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II. 기복, 그 순수한 바람 3. 악샤 Aksha 주사위


붓다는 윤회를 고통이라 했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 했으니, 죽어서 다음 생에 환생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될 짓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붓다를 믿는 사람들은 윤회를 고통이라 여기지 않고, 좋은 덕을 많이 쌓아 다음 생에 극락에서 환생하는 것을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요? 아주 간단히 말하면, 초기 불교의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힌두교의 기반 세계관인 까르마 즉 업보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세상 바깥으로 나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인(因)이 쌓이지 않는 것인데, 소위 재가 신자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 안에 남아 여러 가지 사회행위를 함으로써 인(因)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 그 인이 과(果)로 보상을 받는 것이라는 힌두교의 인과 법칙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렇게 된 마당에 좋은 인을 쌓아 좋은 과를 만들어내 극락에서 환생하는 걸 소망하게 된 거지요. 그러면서 그 극락왕생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의 세계관은 인과응보의 까르마 법칙으로 운용되는 힌두교와 똑같아지게 된 겁니다.


까르마 법칙은 모든 게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원리입니다. 씨를 뿌렸으니, 과실이 나는 것이고, 콩을 심었으면 콩이 나지, 팥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살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나면, 그것은 전생에 자기 자신이 씨를 뿌린 결과라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사건이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 관계없이 발생했을 때 그들은 까르마의 결과라고 받아들인다는 거지요. 그렇게 까르마에 순종하는 것을, 사회 의무 즉 다르마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법과 도덕에 따른 형벌을 받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거나 아주 고통스러운 상태로 환생한다고 하는 믿음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까르마에 순종하는 것은 그 법칙을 벗어나 요행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지요. 특히 물질을 크게 취하려고 과한 욕심을 내는 행위는 엄청난 벌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에 관해 힌두교 최고 경전인 서사시 [마하바라따]의 주사위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지요. 꾸루 가문은 빤두 가문이 잘 나가는 데 질투하여 왕국의 모든 걸 걸고, 주사위 도박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빤두 가문은 체면을 중시하여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도박에 응하고, 속임수에 당해, 왕국은 물론 다섯 형제의 공통 아내까지 모두 잃고 파산당하고 심한 모욕까지 당한 후 유배당하고, 결국 이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터집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물질에 대한 욕망은 그 자체로서 악행은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것을 획득하려는 방식이 도박이라는 우연성에 기대는 것이 나쁜 짓이라는 거지요. 주사위로 상징되는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우연을 나타내지만, 맥락으로는 까르마에 따른 질서를 부인하는, 즉 다르마를 부인하는 것이어서, 결국 큰 파멸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는 걸 메시지로 전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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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전통에서 주사위 던지기처럼 우연이나 운에 맡기는 결정 방식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주사위나 제비뽑기 같은 방식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은 신의 뜻을 묻는 방식 즉 신판(神判)으로서이지, 사적인 도박 같은 방식으로 물질을 탐하는 것은, 나쁜 짓이라는 거지요. 주사위나 제비뽑기 같은 행위는 신판의 결과 즉, 까르마의 결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는 것은 나쁘게 간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차라리 신의 뜻을 묻는 신성한 행위로 활용됩니다. 그래서 힌두교는 점성술을 신의 뜻이 반영되는 천체의 움직임으로 여겨, 매우 중요하게 칩니다. 그래서, 힌두교나 불교에서 사람들이 점성술에 따라 결혼이나 사업 시작하는 일에서 택일을 받는 명리 역술이 크게 발달합니다. 이는 까르마의 법칙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신의 뜻을 따라 미리 파악하여, 그에 순종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지요.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정신보다 열등하거나 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간주하지도 않습니다. 신을 공경하고 예배하며 세상의 질서를 잘 따르고, 그 안에서 까르마와 다르마의 질서를 잘 지켜 신의 축복도 받고 물질적으로 대박 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기원하며 삽니다. 기복 신앙이 종교의 중심을 이룬다는 의미지요. 불교의 경우, 붓다가 추구한 니르와나라는 관념론을 따르는 것이 아닌, 힌두교에서 추구하는 신의 축복으로 물질적 행복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수카와띠, 라는 극락 개념으로 반영되는 거지요. 그런 차원에서 세상 질서를 미리 알고 그에 따라 순종하며 물질을 바라는 점성술 같은 역술이 크게 발달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도박은 위험한 악덕이고 파멸로 이어지지만, 역술은 신의 뜻을 따르는 착한 행위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도 불교에서는 그렇고요. 정신이나 관념이 물질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럽의 플라톤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의 세계관이고 힌두교와 불교의 기복 신앙도 하나의 세계관입니다. 전자는 옳고, 후자는 그르니, 버려야 할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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