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II. 기복, 그 순수한 바람 6. 아제아제 바라아제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불교는 붓다가 설파한 말씀에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붓다의 의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전혀 새로운 길이 더해진 종교입니다. 그러니 세계관도 크게 둘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불교를 여전히 수행의 종교로 인식하는 게 보통이지요. 붓다가 활동한 초기 불교에서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개념 즉 시간. 존재, 궁극 등에 대한 구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구도의 대상은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 행위가 주요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행위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면서 버리고 떠나버리는 대신, 사회에서 벌어지는 얽히고설킨 그 수많은 행위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고뇌한다는 말이지요. 이런 문제를 아주 깊이 있게 잘 다룬 소설 하나가 있어요. 소설가 한승원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입니다.


소설은 속세와 승려의 삶을 오가며 고통받는 어느 여성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립니다.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지만, 속세의 남성과 얽히면서 겪는 삶이 파멸로 다가오는 인연의 법을 말하는 거지요. 서사를 펼치면서 작가가 택한 마지막 장면, 주인공 여인의 자살은 불교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개인의 수행으로 그 질긴 인연을 끊지도 못하고, 아무런 수행의 결과를 얻어내지도 못합니다. 초기 불교의 구도란 현실 속에서 별로 의미 없다는 메시지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다시 속세로 들어가 세상의 이치대로 살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자살합니다.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지만, 초기 불교의 수행도, 대승불교의 이타행 보살의 길도 모두 작은 한 개인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거지요. 자살이라는 게 파멸이냐, 아니면 해탈이냐 하는 문제는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결국, 그 마지막 행위는 작은 한 개인이 처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가 가장 크다고 봅니다. 자살이란 그 끝없이 이어지는 인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 작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몸짓이라는 거지요. 구도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붓다나 보살심으로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한다는 대승불교의 여러 스승의 가르침이 어느 한 작은 개인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 소설이 제목을 ‘아제아제 바라아제’라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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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로, 산스끄리뜨어를 음역한 겁니다. 중국에서 자기들의 발음에 맞춰 음역하였는데, 그 한자 발음이 우리와 달라, 우리의 발음으로는 원어인 산스끄리뜨어와 많이 차이가 나버리게 되었지요. 원래 이 구절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씩 해석해보면, ‘가라, 가라, 저쪽(즉 피안)으로 가라, 완전한 저쪽으로 가라, 깨달음을 성취하라.’라는 뜻이 됩니다. 문자대로 뜻은, ‘저세상으로 가라, 그게 바로 깨달음이니라’라는 뜻이니 조금 더 살을 붙이면, 죽으면 고통의 이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그것이 다름 아닌 깨달음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원래는 죽으면 저세상으로 간다는 뜻인데, 불교를 믿고 그 길을 가는 속세의 많은 사람이 그 구절을 암송하면서 그 내용과 관계없는 자신의 희구를 담은 주문 즉 만뜨라로 작동하기 시작하지요.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그 엄청난 생과 사의 법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억겁의 인연에서 뿌린 씨의 결과를 개인의 노력으로 부인하고 극복할 수도 없고, 샘솟듯 솟아나는 물질과 육체의 욕망을 도저히 제어할 수도 없는 무기력한 인간이 갈 수 있는 건, 죽으면 저세상으로 가, 평안해진다는 구절을 수도 없이 암송하고, 암송하고 또 암송하는 수밖에 없게 된 거지요. 그러다 보니, 원래 그 구절이 가진 의미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서 그저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의 기도문이 된 겁니다. 전형적인 구도나 수행 혹은 깨달음 그런 개인 차원의 종교 행위와는 아무 상관 없는 전형적인 주문, 진언, 기도 등으로 종교적 이상을 희구하는 대승불교의 기복 행위지요.


불교는 변했습니다. 변하기 전의 수행 방편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길로 가면 되고, 변한 후의 방편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길로 가면 되는 거지요. 그 차이는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는 겁니다. 전자는 현실에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니 버리고 나가라는 것이고, 후자는 현실 속 고통을 신의 힘으로 해결하는 게 유의미하니, 열심히 기도하고 주문을 읊으라는 거지요. 이제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현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완연한 주문이 되었습니다. 염불할 때 가장 많이 읊는 구절이지요. 그 뜻을 알든 모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냐라는 게 불교도의 세계관입니다. 그저 바라는 것, 소망하는 것,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거지요. 절에 한 번씩 가보시면, 많은 사람이 남편이 병을 이겨내기를, 아들이 시험에 합격하기를, 집안에 액운이 소멸하기를 빌고 비는 풍경을 쉽게 보실 겁니다. 이때 가장 널리 독송하는 게 [반야심경]이고,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암송하는 게 바로 이 ‘아제아제 바라아제’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는 종교 행위는 건전하고, 뜻 모르는 주문이나 외우면서 복을 비는 것은, 무식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혹은 근대적 이성주의의 산물입니다.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그른 게 아니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을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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