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II. 기복, 그 순수한 바람 7. 옴마니반메훔 Om Mani Padme Hum



앞의 글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물질과 복을 기원하는 주문으로 작동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이보다 더 강력한 주문이 불교에 있습니다. 주문을 가장 중요한 종교의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인식하는 티베트 불교에서 건너온 ‘옴마니반메훔’입니다. 원래는 ‘옴 마니 반메 훔’이라는 네 개의 단어, 여섯 개의 음절로 구성된 이 문구는 산스끄리뜨어, ‘옴 마니 빠드메 훙’을 음역한 것으로 티베트에서 널리 쓰일 때부터 뜻으로 쓰인 게 아니고, 음으로 쓰였습니다. 앞서 ‘옴’에 관한 글에서 말씀드렸듯, ‘옴’으로 시작하는 것부터가, 전형적인 주문인 거지요. 뜻으로 사용된 게 아니라서, 굳이 그 뜻을 새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 뜻을 직역하면 ‘옴, 연꽃 속 보석이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연꽃은 지혜를, 보석은 자비를 상징합니다. 지혜와 자비가 하나라는 의미가 되지요. 대승불교에서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에 속하는 주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베푸는 신입니다. 이 세상, 끝없이 윤회하는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끝까지 단 한 사람이라도 낙오하지 않고 구하겠다고 서원한 보살이지요. 그 중생 구제의 방편이 바로 여섯 음절이니, ‘옴 + 마 + 니 + 반 + 메 + 훔’입니다. 이 여섯 음절을 쉬지 않고 염송하면,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이 그 6도를 윤회하는 중생을 구제해 준다고 믿는 거지요. 그러하니, 붓다나 초기 불교의 수행자들이 행한 어떤 고통스러운 수행을 따로 할 필요도 없는데다가, 사실 뭔가를 깨달아야 할 필요도 없는 거지요. 그냥 염주를 돌리든, 마니차를 돌리든, 그런 것도, 없이 혼자 탑을 돌든, 돌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하든, 여섯 글자의 ‘옴마니반메훔’만 염송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데, 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여섯 음절의 주문이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면, 그 여섯 음절의 주문은 자신이 쌓은 업(까르마)을 모두 제거해준다는 논리가 됩니다. 붓다는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업을 쌓지 않아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업을 쌓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 상태에서 여덟 가지의 길을 통해 깊은 명상을 꿰뚫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로부터 1,000년 정도가 흐른 뒤 티베트 불교에서는 여섯 음절의 주문 한 마디가 그 모든 조건과 노력을 하나로 묶어 이 여섯 음절로 완수하는 것으로 변한 겁니다. 그러니 염송 자체가 초기 불교의 궁극을 대체하는 것이 되었지요. 주문 즉 만뜨라가 깨달음 즉 지혜의 완성이니 그로 인해 업장의 소멸이 발생하고, 나아가 대승불교의 보살이 행하는 자비의 방편을 이루는 방편이 되는 겁니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여섯 음절을 되뇌면, 이 세상에서 기원하는 건강, 복, 장수, 부귀영화, 성공 등 모든 물질적인 것을, 다 이루게 해준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론대로라면, 이보다 더 완벽하고 쉬울 수는 없지요. 이렇게 만뜨라가 가장 중요한 종교의 핵심이 되다 보니 만뜨라야나(Mantrayana 만뜨라의 수레 乘)이라고 부를 정도의 불교가 되었지요. 초기 불교를 히나야나(Hinayana) 즉 작은 수레, 소승이라고 하고 이후의 대중 불교를 큰 수레 즉 대승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만큼 만뜨라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중교라는 것이고, 그 안에 ‘옴마니반메훔’이 있습니다.

그들은 만뜨라의 소리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만뜨라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 에너지와 교감하면서 그 어떠한 일이라도 이루어지게 움직이는 진동이라는 거지요. 수행자는 그 신비의 소리를 반복함으로써 깨달음에 다가간다고 여기니, 음을 반복하는 행위로만 선(dhyana)을 행하고, 삼매 상태에 들어간다고 믿는 거지요. 그래서 이 불교는 불상과 탱화를 대동한 복잡한 의례가 필수고, 그 안에서 만뜨라가 중심입니다. 문자 해독 능력이 부족한 대중들도 ‘옴마니반메훔’만 외우면, 모든 걸 다 깨닫고,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복을 다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거지요. 아주 쉽게 말하면, 옴마니반메훔은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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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통은 인도의 중세 때부터 체계화된 밀교 불교의 변형입니다. 그 밀교 불교는 인도에서 티베트를 거쳐, 고려 시대부터 몽골을 통해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의 중요한 일부가 됩니다. 한국에 들어온 인도의 밀교 불교는 특히 인간이 어떤 거대한 재난에 부닥쳐 무기력할 때 우주의 절대 힘에 기댈 때 많이 사용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할 때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자의 왕생극락을 빌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덜기 위해, 관세음보살에게 자비를 구할 때도 이 주문을 외우지요. 이제 불교는 의례 중심의 종교가 되었으니, 정기 법회든 천도재든, 백일기도든 죽은 자의 명복과 산 자의 복을 기원하면서 혼자 하기도 하고, 절에 가서 승려를 따라 함께 하기도 합니다. 출가 승려가 수행할 때나 재가 신자가 세상일에서 복을 받고자 빌 때나 똑같은 방편을 행하다 보니, 바야흐로, 출가와 재가가 다를 바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지요. 이제 불교는 전적으로 붓다의 합리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혀 새로운 방편의 기복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신비의 언어를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관세음보살 신의 가호를 바라는 옴마니반메훔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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