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II. 기복, 그 순수한 바람 8. 샥띠 Shakti 陰力
‘아제아제 바라아제’나 ‘옴마니반메훔’과 같은 만뜨라(주문) 혹은 나아가 의례가 신앙의 중심이 되어버린 불교에 대해 어떻게 가치 평가하십니까? 저는 어떤 가치 평가도 하지 않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거지요. 다만, 왜 불교가 그렇게 엄청난 변화를 겪었을까에 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몇 번 말씀드렸다시피, 애초에 붓다는 힌두 신앙에서 널리 그리고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주문 같은 것은 절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을 믿고 따르는 것도 물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죽어서 극락에 가는 그런 윤회 세계를 절대 따르지 말고, 세상의 궁극이 뭔지, 그 절대적 진리를 깨달아야만 윤회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했지요.
붓다가 설파한 세상 밖에 진리가 있다는 세계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겠지만, 어디 부모, 자식 세상을 버리기가 그리 쉬운 일입니까? 세상 밖으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했지요. 주체적으로 해석해서 ‘나’의 길을 가라는 건 붓다의 유언 가운데 하나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새로운 해석에 무게가 실렸으니, 500년 정도가 지나면서, 윤회하는 것도 받아들이고, 신을 숭배하는 것도 받아들이고, 기복 신앙도 받아들이고 엄청난 재난에 신의 가호를 바라는 주문 의례도 받아들였지요. 다른 곳도 다 마찬가지지만, 인도에서는 특히 종교의 교리는 사제나 승려에 달린 게 아니고, 그들에게 돈과 물질을 대는 신도들에 달린 거기 때문이지요.
그 신도들은 대부분이 못 배우고 가난하면서 착취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인데, 하나같이 땅 파고 농사지으며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이 믿는 건 땅밖에 없었겠지요. 그 땅이 곧 하늘이고 하나님이고 신이고 하는 생각을 가졌겠지요. 그런 생각은 우리 전통이나 기독교에도 많이 나타나는 건 잘 아실 테고요. 그들은 땅을 여성으로 보았습니다. 여성이란 생산하는 존재니, 땅은 의인화하여 여신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우주의 근원 에너지를 가진 존재, 여신을 쉬바나 비슈누같은 절대 주(主)로 섬기는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그 절대 여신을 샥띠(Shakti)라 부르고 그런 종교 전통을 샥띠교라 부르지요. 다음 글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 드리겠지만, 딴뜨라(Tantra)라고 하는 지식 체계를 따르는 종교 전통이니 딴뜨라교라고도 부르고, 그게 주로 만뜨라(주문)을 외우면서 의례를 수행하니 만뜨라교라고도 하는 전형적인 밀교(密敎)입니다. 밀교란 어떤 메시지를 직접 드러내서 전하는 종교가 아니고, 은밀히, 비밀스럽게 드러내는 종교 전통입니다. 어떤 상징으로 표현하거나 주문을 외워 축복을 내리거나 저주를 내리는, 아주 기괴하고 복잡한 의례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종교의 가르침을 시전하지요. 샥띠는 우주 에너지 그 자체입니다. 이 종교 전통에서는 우주 에너지란 남성적 에너지가 아니고 여성적 에너지라고 믿습니다. 생산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니까, 우주를 움직이는 것도, 여성 에너지라는 것이지요. 그런 맥락에서 만뜨라를 외우는 것은, 절대 에너지 여신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그 절대 여신으로 대표적인 게 락슈미(Lakshmi), 두르가(Durga), 깔리(Kali)와 같은 신들입니다. 엄청난 부와 재물을 가져다주거나, 악마를 잔인하게 죽이고 ‘나’를 보호하는 신이지요. 중세 이후로 가난한 인민들이 희구하던 부와 재물의 추구, 그리고 힘든 삶에서 기대던 카타르시스지요.
앞선 현교(顯敎) 전통에서는 정신이나 관념을 중요시하지만, 밀교에서는 육체를 더 궁극으로 봅니다. 그러니 붓다는 현교 전통에 속한 것이고, 반면, 만뜨라를 중시하는 티베트 불교는 밀교 전통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 육체 즉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 의하면, 우주의 진리와 모든 신들은 다 육체 안에 존재하니,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육체 안에 존재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관 안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해탈은 정신을 통해 브라만-아뜨만의 일치를 찾거나 깨달음의 니르와나를 이루는 게 아니지요. 뭐니 뭐니해도 생산이지요. 잘 먹고, 잘 살고 몇 년 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에 나오는 그 정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교에서 부정하는 모든 것을, 다 긍정합니다. 예컨대 섹스, 고기, 피 같은 것들을 역으로 더 숭배하는 카운터 컬처(counter-culture)인 거지요. 그 대표적인 예로, 깔리는 잘라 낸 악마의 머리를 한 손에 들고 또 한 손으로는 피를 받아먹으며, 목에는 해골로 만든 목걸이가 있고 허리에는 잘린 손으로 만든 치마를 두르고 있는 잔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는 어떤 하나의 종교 전통이 전체 세계관을 독차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한쪽이 정신이 근본이고 육체는 열등하다고 하면, 다른 쪽에서는 정신은 환상이고, 육체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둘은 모두 공존합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이단으로 처단하는 전통이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하지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