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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0.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29

버린다는 것은 바란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세상을 버리고 나가는 사람들은 우선 이름을 버렸다. 그것은 가족을 버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족은 떠나온 속세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 상징으로서 가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을 버리는 것이다. 집안에서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장신구를 버린다. 세상을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남편이 죽게 된 죄를 사하여 줄 것을 신께 바라는 것이다. 집안에서 어른이 죽으면 머리카락을 버린다. 그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음 세상으로 고이 가는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면서 명복을 비는 것이다. 화장터에 놓인 장작더미 위에 머리카락을 던져 줌으로써 그는 강을 건너 남쪽 염라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버린다는 것이 바란다는 것은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보다 더 간절함이 또 있을까? 세 살이 되기 전에 부모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준다. 그러면서 복을 구한다. 집안에 큰 복을 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집안을 이끌고 나가는 여성이 머리카락을 자른다. 성스러운 사원에서 자르면 신의 마음을 더 크게 움직일 수 있고, 머리카락이 길면 길수록 그 정성은 더 큰 신의 감화를 얻어낼 수 있다. 여인이 그 긴 머리카락을 밀어 신의 제단에 바치는데도 신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신이 없기도 하지만 분명히 있기도 하다. 신이란 인간의 바람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바람이 강하면, 신의 저주는 커진다. 그 신을 만들어낸 사람이 그 약한 인간의 바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 성지를 다니다 보면 삭발을 한 남자를 많이 본다. 그 사정이 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그이가 매우 절실하게 뭔가를 신에게 바라기 때문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버렸고, 그 절실함을 실현하기 위해 이 성지까지 와서 신에게 빈다, 라는 사실이다. 삭발은, 그래서, 특정 문화 내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그것이 참 계산적이더라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그 가호를 바라면, 그만큼 뭔가를 줘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계산의 법칙이 깔려 있다.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한다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줘야 하고, 그 사랑함을 보여주려면 자신이 갖는 뭔가를 희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의 기술이자 법칙이라는 메시지가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신의 사이로 반영되는 것이 종교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으로부터 사랑은 오지 않거나 한 술 더 떠 보복이 오기도 한다. 신의 저주는, 그래서, 항상 상수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큼이나 감정적이고 이기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힌두교 이외의 세계 곳곳의 종교 문화를 통해서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신과의 세계에조차 적용이 되어야 하는 그 인간적인 계산의 이치를 사진으로 재현을 해야 하는데... 참으로 고민이 깊다. 여러 방식으로 재현을 고민해보다가, 저 삭발한 머리, 쉬바Shiva신의 머리에서 갠지스 강이 나온 그 신화에 따라 머리카락 한 가닥을 남겨놓은 저 충성스러움을 또렷이 아주 또렷이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방식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카메라의 초점을 머리카락에 집중한다. 포커스인focus-in이 되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흐릿해진다. 다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사진에서 포커스를 받지 못하면 존재감이 흐릿해지는 게 실제 세상에서의 이치와 같다.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화제 바깥으로 내보내버린다. 이미지는 사진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난, 그렇게 사진을 찍고, 거기에 가장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때로는 그 이미지를 통해 사실 적시를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사실 적시해서는 안 되는 담론을 풀어놓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때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일련의 기호밖에 없다. 그 기호가 삭발을 한 어느 머리라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럿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삭발을 한 머리가 문화적으로 볼 때는 버림-바람의 의미가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머리라는 기호를 보여주는 사진이 꼭 그 버림-바람의 관계를 말하고자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건 그 사진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기 전에는 제대로 알 수 없다. 그 이전에는 사진을 읽는 독자가 마음껏 해석을 해보는 것도 좋다. 그 해석과 사진가의 의도가 일치하면 하는 대로 좋고, 일치하지 않으면 또 그것대로 좋다. 두 방식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이 사진 세계의 이치다. 그 어떤 경우라도, 적어도 나는 내 사진을 통해 사진이 이렇다 혹은 이래야 된다, 혹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하나의 방식이 아닌데다가, 상대방에게 그 해석의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의 생명은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소리의 뼈

기형도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 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 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인도, 마디야 쁘라데시, 웃자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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