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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19.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28

인도에서 사람들은 아주 오래 오랜 옛날 옛적에, 역사적으로 보면 베다Veda 라고 하는 자기들의 계시서를 말로 편찬하기 시작한 기원전 1,500 년경부터 불을 숭배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경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하늘이라는 신이 더 높지만, 그 때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늘은 그저 하늘 일을 하는 신이고, 불은 또 불의 일을 하는 신일뿐이다. 나훈아 좋아하고 따르는 팬들이 있고, 조용필 좋아하는 팬들이 있었을 뿐, 지금같이 빅뱅인지 승리인지 하는 가수가 최고의 위치에서 모든 걸 다 독식하는 그런 신의 세계에서의 위계는 없었던 시절이다. 불은 사람들의 염원을 하늘로 전해주는 일을 하는 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고, 거기에 바치는 공물을 불로 태운다. 그러면 그들의 염원은 하늘로 올라간다.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염원이 되고, 머리로 받아들이면 역사가 된다. 사람들은 제사를 통해 현현하신 신을 만났고, 그래서 무엇보다 제사가 가장 중요한 공동체의 일이었고, 그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맡은 불이 가장 많은 인기를 받았다. 


제사에 바치는 공물로 코코넛을 바닥에 쳐 깨서 불에 던진다. 여자들 힘으로는 잘 깨지지 않으니 으레 남자들이 그것을 깨뜨리는 일을 하고, 그런 와중에 어린 아이에서 청년으로 갓 옮길까 말까 하는 열다섯 청춘 아이들이 곧잘 힘자랑을 하는 장소다. 힘자랑을 하는 도중에 삐끗하면, 아버지가 나서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한수 가르쳐 주곤 한다. 가족 모두가 한껏 웃음을 터트리는 장면인데, 제사든 예배든, 항상 그렇듯 그리 심각하지도 장중하지도 않다. 그런 자리에 꼭 끼어 드는 불청객이 있다. 원숭이다. 먹을 게 있으니 그 또한 한 몫 잡으려는 거, 당연한 이치다. 어느 누구 하나 그 원숭이를 쫓아내지 않는다. 카메라를 들고 싶은 감정이 인 것은 저 원숭이가 시야에 들어와 프레임의 교묘한 위치에 섰을 때였다. 여성의 머리카락 다발이 투박스럽게 보이고 그 위에 원숭이가 비웃는 듯, 아랑곳 하지 않는 자세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마침 불의 신 아그니Agni가 현현하신다. 그 불의 신을 보는지, 원숭이를 보는지, 그저 멍 때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 하나가 원숭이와 시선을 같이 하면서 화면에 등장한다. 더 이상 좋은 구도는 없다. 사원에 들어설 때 어렴풋이 마음속에 둔 장면이어서 원하는 구도에 들어서자 주저하지 않고 몇 커트 누른다. 이미지는 항상 조롱이든 위트든 풍자든 뭔가 찌름이 있고 그에 대한 해석이 따라야 한다고 난, 믿는다. 그런데 내가 예상 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게 사진이 나왔다. 속된 말로 하나 건졌다. 사진은 우연의 예술이어서 건지는 것이, 어느 시인 말대로 하면, 팔할이다. 그래야 사진 보는 맛이 난다.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연은 우리 같은 범인은 발버둥 쳐도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의지도 아니고 방향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법에 의해 발생하는 것. 그 법이 뭔지를 알아보려고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면 이미 우연이라는 것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 그렇다고 그 우연이라는 존재를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에 부딪혀 쓰러지지만 그것이 우연의 소산이라는 것은 전혀 알 수 없는, 역으로 알 수 없는 어떤 것 덕분에 순풍에 돛 단 듯 나아가지만, 그것이 그 우연의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 모든 게 나의 계산의 힘이라고 착각하는 것. 근대인의 세계는 이 우연을 무시하는 필연의 영역에서 사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이성의 힘을 믿는 세계다. 그들의 눈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밖에 없고, 그 힘을 운항시키는 것은 의지다.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 있을 수 없으니, 파악할 수 없는 숭고의 영역도 없다. 반면,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서는 우연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신이든 제왕이든 영웅이든 모두 그 우연의 법칙 발아래 머리를 조아린다. 그것이 우주의 법이자 자연의 법이다. 우연의 비호 아래, 인간은 신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다. 그 안에서 신은 죽는다. 이는 인간이 자연 안에서 얼마나 고귀한지를 세우기 위해 찾아낸 이치다. 기독교나 근대 세계에서와 같이 신과 과학의 절대성 안에서 인간을 죽이는 일은 없다.

      

카메라는 기계라서 필연의 세계다. 그렇지만 그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빛이고 빛은 자연이다. 그 빛을 의지의 영역 안에서 굴복시킬 수는 없다. 사진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빛을 극복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사진은 우연이다. 그 우연의 세계 안에서 나는 사진의 맛을 찾곤 한다. 


만약 사태들이 자성으로부터

존재한다고 그대가 간주한다면

그와 같다면, 사태들에

인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대는 간주하는 것이다.

나가르주나 《중론》    

 

인도, 마디야 쁘라데시 나그뿌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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