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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19.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27

인도에서 거리 사진을 찍을 땐, 마음이 참 편하다. 사람을 촬영하는 것에 대해 그 사람들이 그리 큰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래 전 고대 때부터 세계를 움직이는 절대 존재가 신으로 형상화 되었음을 믿어 왔고, 그 신을 최대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겨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람 또한 신상을 꾸미는 방식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신을 만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도 했고, 형식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공히 추구하는 것이 곧 신과 합일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신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도 신에게 봉헌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신을 아름답게 그림으로 그리는 것 또한 신에게 봉헌하는 것이고 같은 맥락으로 조각하거나 연극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듯 신상을 아름답게 사진 찍는 것 또한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엄숙한 의례 상황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것과 같이 신에 대한 찬양의 차원이 아닌 경우는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을 사진 찍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이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찍는 경우는 매우 싫어하지만, 자신이 맘껏 치장을 하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할 때 카메라를 과하지 않게 들이 밀면 데체로 그대로 오케이다. 다만 예의상 눈으로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은 사진가로 지켜야 할 예의일 테고. 혹간은 지나가는 사진가를 불러다가 왜 옆 사람은 찍고 자기는 안 찍어주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 아이들을 찍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꼭 그 이미지를 보여 달라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자신을 사진으로 찍어주는 것은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자신은 그런 대접을 받았다 하여 기분이 좋아져서 그러는 것이다. 존재의 확인이라고나 할까?   


바라나시에서 만난 이 가족의 경우에도 그랬다. 골목에서 브라스 밴드의 연주 소리가 한창 신나게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잽싸게 뛰어가보니 결혼식 도중이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가볍게 눈으로 물었더니 예의 노프라블럼이다. 모두들 신나는 축제에 외국인 사진가까지 끼어들어 사진을 찍어주니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하자 신부 집에서 환영하는 춤판이 벌어진다. 옷은 화려하고 또 화려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든 장신구를 차고 나오니 신을 꾸미듯 자신을 꾸며 신도 기쁘고, 자신들도 모두 기쁨이 넘친다. 축제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를 몸소 보여준다. 당사자도 즐겁고 하객도 즐겁고 지나가는 객도 즐겁다. 초상권 같은 건 생각지도 않는다. 사진가가 자신들을 일부러 나쁘게 찍을 것이라고는 혹은 나쁜 용도로 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초상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우주 자연의 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에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가 사람 사는 세상의 것이 아닐까? 사진을 찍는 것이 무슨 죄를 짓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몰아가는 인도 바깥 세상 세태가 참 야속하다. 사진이라는 것이 찍히는 대상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이 될 테고, 그 찍히는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 사랑하는 감정을 전달받으니 예술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을 통해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존중받는 감정을 갖게 되면 그 사진은 사랑을 불러일으키거나 상처받은 것을 치유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상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는 사진이 예술적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통해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사진이 예술의 소임을 다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꼭 프레임을 흔들고, 전형으로부터 벗어나 형식 파괴의 창의성을 찾아 새로운 창작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만, 평범하게 대상을 존중하고 소통하는 방식으로 찍어도 그 사진은 예술의 순기능을 다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지치고 고통 받고 있다면, 따뜻함으로 가득 찬 사진 한 장이 우리를 치유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진이 이미지로서 갖는 창작의 예술성으로서가 아니고 그 사진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대상과 소통하는 행위가 우리를 치유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감동이고 감동은 희망이자 사랑이다. 그 이미지 자체가 창의성이 결여 되어 작품성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찍는 과정에서 대상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이 되면 그 사진 찍는 일 자체가 예술이 된다. 그런데, 사진 이미지라는 결과가 얼마나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 되느냐를 관심의 핵심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작품을 가운데 놓고 그로부터 인간을 소외 시키고 나아가 그 구조에서 갈등이 생겨나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술성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결과만 추구한다. 

    

자신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타인이 수긍하게끔 만들고자 들이는 노력은 명예욕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자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이 귀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장애가 된다. 모두 사랑과 칭찬을 원하기에 그들은 서로 미워하게 된다.     

스피노자 《에티카》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바라나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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