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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19.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26

불교에서 중은, 역사가 흐름에 따라 그 성격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속세를 떠나 승가에 머물러 수도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으뜸이다. 속세를 떠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를 부정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요즘그런 중은 거의 없다.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속세를 움직이는 여러 기호나 장치에 현혹되는 것만이라도 멀리 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은 게 현실이다. 사람들은 여자를 끊고, 돈을 멀리하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매우 수준 높은 절연의 방식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더 본질적인 현 세계의 여러 장치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선 뭐라고 시비를 걸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가 세상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세상 안에 의미가 없어 밖으로 떠난 사람들이 세상 안에만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고 세상 안으로 들어와 살아가는 방편은 또 그것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무엇이든 변화하고, 영원한 것이 없고, 근본이라는 것이 없어야 함이 불교의 제1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불교 초기의 방편이 역사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를 했으면 그건 그것대로 존중받아야 하는데, 왜 술과 여자는 인정하지 않고 다른 기호는 인정해주는 것일까?


나는 세상을 즐기는 차원에서 사진을 찍고, 읽고 사진과 엮여 있는 여러 문화 특질들에 대해 비평을 한다. 그 안에는 역사도 있고, 역사성과 관계없는 예술과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글도 있고, 사진이 사용되는 여러 도구로서의 의미에 대한 글도 있다. 2009년 어느 날 인도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에서 뭔가 사진과 세계에 대한 생각에 잠겨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때 일군의 불교 중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순간 어느 한 중이 카메라를 들어 내가 있는 쪽을 발견했고, 여지없이 나 또한 그런 그의 모습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찰나의 순간, 이 장면은 매우 불교적 장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에서 세계는 순간이고 그래서 그것은 덧없는 것이다. 사진에서 세계 또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본질 없는 이미지일 뿐이다. 그런데 불교가 변하여 중이 레코드 취입을 하고, 그림을 그려 전시를 하고, 전문 방송국에서 DJ를 하고, SNS를 만들어 고정 구독을 하라고 별의 별 아양을 떤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간통을 하는 그런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탐하여 세상 모든 탐진치를 몸소 이고 가려는 그것이 보살의 자세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느덧 그들이 세상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이다. 사진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는 듯 하다. 이미지가 본질을 만들어내는, 그래서 사람들은 본질을 가꾸고 닦는 것에 수양을 하지 않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에 전념한다. 불교든 사진이든 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어서 그렇다. 세계는 더 이상 고통의 바다고 사라져버리는 찰나가 아니고 이제 인연을 쌓아가면서 즐길만한 어엿한 소유의 공간이다. 무소유와 해탈을 말하려 하는 것은 너무나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이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결국 카메라라는 기계와 눈앞에 존재하는 대상이 순간적으로 만나면서 생성되는 이미지다. 그 만남은 필연이든 우연이든 존재가 변하여 생성이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존재가 외부에서의 어떤 돌발적 충돌로 인하여 카메라를 든 사진가에게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이고, 그것은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이 던져지면서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작용으로 어떤 생각이라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 생각은 순간이든 찰나든 인간이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안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동작을 낳고, 그로 인해 사진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계는 무상無常하다. 영원한 것이 없다. 한 번 정해졌다 해서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그 성격을 유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모든 것이 변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그런 삶이 자연의 삶이다. 종교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한 장르일 뿐이다. 그 안에서 항상성이 있다는 말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일부 종교 팔이 하는 이들의 값싼 레토릭일 뿐이다. 사진 또한 마찬가지다. 사진은 순간적으로 대상과의 만남에서 발생한 기계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 종교를 통해 사람들이 사랑하고, 서로 존중할 때 종교는 종교다운 것이 된다. 원래 있었던 것이 변했다 해서 비난을 받거나, 안 변했다 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종교를 인간 억압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초기 사진의 의미를 꾸준히 가지고 가든, 사회의 변화에 따라 매체의 의미가 바뀌면서 함께 바뀌든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사진을 하는 과정 속에 인간이 들어 있느냐에 대한 사유의 유무 여부다. 그렇지 않고 사진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가르치고, 그것으로 우와 열을 가리려 하는 것은 사람을 사진 아래 굴복시키려 하는 짓이다. 종교는 종교일 뿐이고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것을 뜻한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바라나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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