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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0.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0

신에게 바치는 것은 처음에는 공동체 단위로 행한 거대한 규모의 희생제였다. 아주 오래 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이주해 들어온 아리야인들은 그리 하였다. 제사라는 것은 반드시 살아 있는 동물을 죽여 그 피가 제단에 뿌려 바쳐졌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사는 단순화 된 예배로 교체되었다. 예배 의례에는 주로 촛불을 밝혀 바쳤고, 기름과 꽃을 드렸다. 예배를 드리는 자는 몸을 정갈하게 하고 최대한 좋은 옷을 입었다. 이곳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는 신에 대한 인지상정이다. 예배 때 인도 사람들은 붉은 색을 비롯하여 주로 화려한 색으로 된 옷울 입는다. 쌀전병도 바치고, 바나나도 바치고, 코코넛도 바친다. 모두가 다 정성이니, 손으로는 먹을 것을 바치고 입으로는 신에게 드리는 말씀을 염송한다. 고개는 떨구고 두 손을 모아 빈다. 그 장소는 아무래도 괜찮다. 아무 데든 그곳을 신이 계신 곳이라 하고, 돌이든 나무든 깨끗한 걸로 신을 삼아 안치해 성화 의례를 거치면 그곳이 신성한 신의 거처가 된다. 그것이 어떤 예기치 않은 일로 무너지거나 훼손당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새로 또 성화를 하여 신을 모시면 될 일이다. 신은 인간의 정성이 있으면 어디서든 나타나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의 절정은 여성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었다. 내 눈에 그리 하였더라는 것이다. 오체투지를 하는 것은, 적어도 내 눈에는 너무 과하게 보여 자극적이기만 하지, 인간의 신심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지가 않는다. 카메라를 든 나는 여러 촛불들이 봉헌된 작은 사당 앞에서 봉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리기만을 기다린다. 까만 머리카락을 꽃으로 묶은 한 여인이 내 프레임 안으로 들아온다. 순간 그의 손이 눈에 들어오는데, 피부가 멜라닌 색소가 파괴되어 일종의 이상 현상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얼굴 위로는 어디선가 빛이 만든 그늘이 드리워진다. 평면이 입체적인 모습을 띠고, 그 여러 면이 중층적이 된다. 이미지로 만들어지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없는 형국이 되겠다 싶을 때, 그 순간, 셔터는 여지없이 끊긴다. 사당에 바쳐진 빛과 그늘 그리고 여러 색깔의 화려함과 하얀 반점이 곳곳에 생긴 그의 손이 서로 섞이면서 장면의 경계가 흐려져 버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 경계의 무너짐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전체와 구분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고대 힌두 철학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사진을 찍으면서 오랫동안 머금고 있었던 터다. 그래서 그런 궁구를 하기 좋은 이미지가 오면 여지없이 셔터를 누른다. 나로선 물질과 정신이 하나인지, 둘인지, 둘이 아닌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진을 찍고 보고 읽고 해석하면서 그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눈과 세계, 본질과 현상, 전체와 부분, 물질과 정신 등 둘의 관계가 어떤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그냥 남들이 좋은 구도라고, 일관된 톤이라고 평가하는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그 이미지가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인문의 세계를 불러일으켜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유할 있도록 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내게 사진을 찍는 것은 대상과 접촉하는 것이고, 그 접촉하면서 만들어진 충돌이 여러 생각으로 번지기 때문에 사유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행위이다. 그 안에는 사진에 대한 메시지도 있지만, 나만이 대하는 태도나 스타일도 있다. 스타일이 없는 사진은 재미가 없어 하고 싶지가 않다. 삶도 그렇다. 내 스타일이 있다. 그런 게 없으면 '내' 사진/삶이나 '나'만의 사진/삶 하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로 말해보자면, 사진을 읽는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사진가의 시각이나 메시지만 이해하려 할 것이 아니라, 사진가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나 그것을 표현하는 스타일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사진을 가지고 서로 소통하는 일에 더욱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다시 사진가의 차원에서 보자면, 시각이나 메시지는 좋은데, 자기만의 스타일이 없으면 따분하고 식상하다. 그런 사람은 플라톤이나 바울만큼이나 재미가 없다. 그것이 예술이든 삶이든 내용만 있고 메시지만 있으면 무료하다. 거기에 감성이 곁들여져야 한다. 그래야 멋이 생기고 맛이 생긴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없는 것, 그런 사진은 하기 싫다. 


남들이 말 할 때 이상하다고 하거나 이해해주지 못하더라도, 나만의 스타일을 살리는 것, 그것이 사진하기고 나아가 삶을 살아가기다. 이는 글쓴이, 말하는 이, 사진하는 이, 정치하는 이, 그 모든 사람들의 그 속내와 의미를 알아차리고자 하는 독자로서, 청자로서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눴으면 하는 말이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충하는 것, 자연 곁에서 자라나되 그를 능가하려 드는 것이다.     

니체 《비극의 탄생》

인도, 따밀나두 첸나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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