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수 Apr 20.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1

사진가들이 좋아하는 시간, 오후 5시. 해가 넘어가려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빛이 길게 늘어지면서 색 온도가 따뜻해지고 그늘과 그림자가 생겨 여러 면이 만들어지니 입체의 실재를 단면의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사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마운 시간이다. 보기가 다채로워져 미장센을 만들기가 한결 좋다. 그러니 입체를 단면으로 옮겨야 하는 운명을 지닌 사진가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입체성을 살릴 수 있는 이 시간을 좋아들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기록성이 강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작업하는 경우, 사진이 특정 시각에 몰려버리는 일이 발생한다는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사건이라는 게 꼭 빛이 좋은 오후 5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도, 그 시각만 기록하는 것이 되어버리니 실제성에 대한 느낌이 좀 떨어지게 되어 버린다. 


사진이라는 게 그 어떤 주제라도 일단 보기 좋아야 함은 자연스러운 이치고, 그런 차원에서 사진의 물성이 뛰어나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이론의 여지는 없겠으나, 기록 사진이 특정한 어떤 시각에 몰리면 기록성에 치명타일 수 있다. 이를 방지하지 위해 사진가들은 이런 오후 5시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간에 사진 기록을 남기는 경우 플래시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빛을 조절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무미건조한 그래서 전혀 아름답지 않아야 하는 어떤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세상은 분명히 아름답지 못하는데, 왜 사진은 아름답게 그려야 하는가, 라는 오랫동안 사진의 논쟁이 되는 그 케케묵은 문제에 봉착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내 경우는 그런 인공 조명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게 아름다워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 아름다움이라는 게 형식적 미가 우선적으로 중요하여야 한다는데도 동의하지만, 그 형식의 미가 틀에 박힌 듯, 누구나 다 어디서나 다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보편적 표현 방식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일로 인도에 간다. 연구나 조사하러 가기도 하고, 세미나 같은 데에 참석하러 가기도 하고, 그냥 돌아보기 위해 가기도 한다. 그 어떤 경우라도 오후 5시가 되면 대개 일과는 마무리되기 쉽상이다. 한국과 같이 무슨 뒷풀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오후 5시 일과가 끝나는 무렵이 되면 난, 대개 카메라를 메고 내가 있는 곳 주변을 돌아다니곤 한다. 막상 어디를 딱히 정해놓고 가는 것은 아니니 발걸음은 대개 자연스럽게 흐르는데로 맡겨진다. 무슨 왁자지껄한 일이 벌어지는 곳 혹은 사원이나 시장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대개 좀 후미진 곳으로 간다. 뒷골목에 사람 사는 맛이 나는 풍경이 있어서 그렇고, 내 청춘 처음 인도에 와 많이 놀랐던 그 추억이 여전히 담겨져 있어서 그렇다. 그곳에 가면 일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일하는 사람 풍경은 내 작업의 큰 주제와 어떤 형태로든 연계가 된다.     


어느날 델리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를 다녀온 후 안사리로드Ansari Road 책방 거리를 가려 뒷골목으로 길을 접어드니 일련의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한다. 짐꾼들이다. 빛이 저들을 저렇게 보이게 해서만도 아니고, 대개 저 사람들은 원래 저렇게 평안한 모습을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저들, 소위 사회 밑바닥에 있는 저 막노동자들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생각도 하고.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내지 못해서 그렇다. 저들의 역사는 오로지 나 같은 타자의 시각을 가진 자에 의한 사료로만 재구성되는 경우밖에 없다고들 말하곤 한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저들 안에 들어가 저들의 삶을 기록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참여이고 관찰일 수밖에 없다. 그 자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푸코의 말마따나 비정상 정신병을 다루는데 병을 앓지 않는 정상 의사의 시각으로 하는 것이 근대의 산물이다. 그러니 그게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의사는 정상인의 이성으로 보고 정신 이상자는 그 이성의 세계에서 존재를 박탈당해 감정으로 말을 하니 그 치유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둘은 크게 봤을 때 같은 이치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그게 진실인데, 소수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기껏 해 봤자 알아들을 수 없는 괴이한 소리밖에 내지 않는다. 그걸 다수 혹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외면할 수밖에 없고. 그들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나 같은 타자가 저 사람들과 동일하게 되어 - 참여하여 관찰하는 것이 아닌 수준으로 – 그 위에서 기록을 할 때 가능할 텐데 ... 다수와 정상이라는 권력자들이 설정한 세계 안 어딘가에 그 두 공간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과연 할 까? 어떤 진실의 공간이 가능할 것이냐는 질문이다.  

    

사진가는 그런 기록을 할 수 없다. 사진가가 하는 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객이 이런 저런 생각나는 것들을 이성의 언어가 아닌 감성의 소리로 전하는 허탄한 짓일 뿐이다.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지만 무심코 스쳐 지나가지만도 못하는 어중간한 이야기꾼의 슬픔일 수밖에 없다.      


철학적 담론이 밖에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면서 그들에게 진리가 어디에 있고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자 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것이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 2》     

인도, 델리, 2012


작가의 이전글 사진으로 긷는 인문 3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