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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0.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2

2009년이니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1년 정도 지난 때다. 20년 넘게 공부해 온 인문학을 통해 얻은 여러 가지 사유들을 바탕으로 역사와 기록 그리고 종교와 철학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던 시간이었다. 읽고 토론하면서 카메라와 씨름하던 그 시절, 잠도 못 자고 고민하던 시절이다. 소위 유명하다는 세계적인 사진가의 사진을 많이 보는 게 좋다고들 해서 그렇게 따랐다. 그러면서 오로지 머리에는 뭔가 남들하고 다른 사진, 내 주체적인 사진, 예술적 감각이 있는 사진, 메시지가 강한 사진을 찍으려는 욕망만 있었다. 이른바 작품 하나 남겨 보자는 욕망이었다. 철저하게 잘못 배웠다. 


그때는 남의 사진을 봐서는 아니 되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 지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을 우선 했어야 했다. 유명과 성공에 기대서 사진의 물성을 볼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면서 사유와 성찰의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를 고민했어야 했다. 왜 사진으로 기록을 하려 하는지, 왜 문학적 기록으로 남기려 하는지, 사진으로 추구하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선 고민했어야 했다. 그리고 유명과 성공에 기대어 찍는 방법을 가르친 여러 지침들에게 철저하게 저항할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것이 문법이든 규범이든, 어떤 종류의 전통에 저항하지 않는 채, 새로운 시도 없이 작품이라는 것이 나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새롭게 발을 딛은 사진계에서 난, 그리 하지 못했다.      


갠지스 강 바라나시를 오랜만에 갔다. 관광 상품이 된 힌두교 예배의 극단적일 정도로 자극적이고, 조야하고, 통속적인 모습에 충격을 먹고, 그것을 담으려 온갖 방식으로 카메라 질을 했다. 남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엎드리거나 오르거나, 걸치거나 하여,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려 애를 썼다. 대상이 자극적이니 사진도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취한 방식이지만, 사실은 그것보다는 자극적인 프레임 워크가 좋은 사진인 줄 알고 한 어리석은 사진 질이었다. 지금 와서 사진비평가의 눈으로 보니, 캠프camp에 가까운 사진이라 할 수 있겠다. 수잔 손탁이 규정하는 바, 무절제하고 괴이한 탐미주의 스타일로 보이는 그런 사진 말이다. 당시 차오르는 열정과 과감성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사진으로 하는 캠프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 하다.     


사진이 기록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아니 사진 아닌 삶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겉으로 하는 새로운 시도는 멋으로 친다. 그러나 새로운 담론을 동원하여 기존의 전통에 어떤 치명적인 저항을 시도한다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기존 세상을 파괴하려는 다이너마이트 속성을 갖기 때문에 권력에 의해 결국 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통 권력은 일정한 전통과 문법을 만들어 그에 도전하면서 자신들이 쌓아놓은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고, 저항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 시도는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고, 위험한 짓이 되며, 환상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공격한다. 그러니 새로운 시도가 권력이 만든 문법을 비웃는 건 손가락질 당하고, 아웃사이더로 몰리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 명을 재촉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겉으로만 새롭게 놀도록 권고한다. 그것이 캠프까지는 허용하는 이 세계의 문법이다.    


치명적 저항으로서의 새로운 시도는 캠프와는 다르다. 그 치명적 저항은 도덕과 문법으로 구조화 된 기존 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니 당연히 패배란 이미 배태되어 잇는 것이다. 문제는 그 패배 이후에 일어난다. 패배해 좌절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그때 그 시도를 후회하게 되면 그 치명적 저항은 보통 치명적 배신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는 자신의 젊은 혈기를 반성하고, 사과하고, ‘돌아온 탕아’가 되어 전통과 문법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면 전통과 문법의 권력은 그 탕아를 환영하고 용서하고 품에 안는다. 그리고 회개와 갱생의 신화를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도는 젊었을 때 사서 하는 고생이라는 덕담으로 환치되고, 어리석은 혈기로 자리 매김 한다. 누구나 철이 안 들었을 때 한 번 쯤 해볼 만한 인생의 양념으로 넘긴다. 승자의 '아량'은 시도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낳는다. 지나간 시도를 후회하면서 자기 존재를 부정해야 살아남는다. 반성과 용서는 신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시도라는 이름의 저항은 삶을 파멸시키는 존재가 되어 영원무궁토록 따라서는 안 될 귀감이 된다. 진리 안에서 자유를 찾아야지, 자유를 통해 진리를 찾는 것은 위험한 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자유를 찾고자 하면 자신을 인도하는 목자의 보호 아래 그가 제공하는 푸른 초장 안에서만 누릴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무서운 철칙이다. '오직 성공', 인간세 비극의 근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독립할 수 있고 명령할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적당한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그 시험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놀이 가운데 가장 위험한 놀이일지라도, 그리고 결국 다른 심판관 앞에서가 아니라, 증인인 우리 자신 앞에서 행해지는 시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시험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니체 《선악의 저편》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바라나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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