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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1.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3


내 눈 높이 쯤에 신의 얼굴을 한 어떤 가면이 나무 가지 잘린 곳에 걸려 있다. 처음엔 갓 베어낸 날카로운 가지 터기와 지나다니는 사람이 부딪히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듯 하다. 힌두교 세계는 범신론 위에 있다. 세상 모든 존재에 본질이 있고, 그래서 세상 모든 존재가 다 신이다. 신은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뜻도 되지만, 내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에 신을 모실 수도 있다는 뜻도 된다. 누군지 모르지만, 저 가지 잘라낸 터기를 보고서 그곳에 신을 모시고 싶었을 것이다. 신을 모시게 되니, 가지를 잘라 보낸 저 나무는 히에로파니(hierophany 聖顯)가 되는 셈이다. 우주의 중심이 되는 나무, 그것이 당산나무든, 신단수든, 보리수든 간에 나무는 항상 재생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는 존재다. 그러니 저 가지 터기에 신을 모시기에는 최상의 맞춤이지 않을 리가 없다. 


신이 만드는 세상이 아름다워야 신에게 감사한 것이니, 신을 모시는 곳을 최대한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미적 감각을 동원해서 색감도 맞추고, 모양도 꾸몄다. 신의 모습은 인간이 소망한 바에 따라 만들어진다. 신의 이야기는 팍팍한 삶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자 만든 인간의 이야기다. 그래서 신의 모습은 항상 인간 그대로 닮아 있다. 신이 있는 곳에 인간이 있어야 하고, 신 안에 인간이 있는 것이다. 신의 이야기가 그리는 세계는 총체적이다. 어느 하나가 떨어져 나가 독립적으로 기능을 하는 것은 없고 모두가 다 태곳적부터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항상 유토피아를 그린다. 파편화 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다. 좌절을 딛고 일어서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닮고 싶은 것이다. 지금 사는 세계가 인간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에는 사람들이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넘나들었다. 실제니 실체니 그런 것만이 근거가 되고, 그런 것만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 안에 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 서로 소통하였다. 그 세계 안에서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가상인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근대 이후 이러한 세계관은 폐기되었다. 오로지 실체와 과학만이 세계의 근거가 되고, 의미라는 것은 그에 종속된 부분일 뿐이다. 이야기는 문학 속으로 쫓겨났고,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천덕구니 취급을 받는다. 이야기가 사라지는 곳에서 놀이가 살아남아 있을 리 만무하니 인간은 바야흐로 놀이를 빼앗긴 일과 성취의 노예가 된다. 그 와중에 인간이 만들어낸 신의 이야기는 권력과 물질을 그러모으는 최고의 수단이 되었다. 인간이 들어 있는 신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인간을 조종하는 신의 이야기만 살아 역사한다. 신의 이야기에 어려움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인간 세계를 세우는 모습은 사라지고, 신이 군림하고 인간은 그에게 복종하도록 요구받는 종교만 있다. 만들어진 신의 이야기를 굳이 과학으로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음에도 그들은 꾸역꾸역 증명하고자 한다. 이야기를 과학과 같이 하찮은 것으로 격하시키는 짓이다. 만들어진 이야기를 꾸역꾸역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긴다. 이야기를 객관과 같이 탈인간의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짓이다. 모든 사람이 과학을 섬기고, 객관을 숭배하면서 자유롭게 놀이 하고, 자유롭게 창작하면서 바라고 빌고 상상으로 만드는 인간 원초의 세계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근대인은 과학을 세우고 이야기를 버렸는데, 버려진 게 사람이더라는 이야기다.    

   

신이 저곳에 있으니 그와 꼭 닮은 인간의 모습이 그와 함께 사진에 있어야 했다. 저 신의 모습을 닮은 누군가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여인이 시야에 들어온다. 낮은 데로 임한 신과 함께 하기에 충분히 낮은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의 행색인 것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신의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인간의 모습을 포커스 아웃을 하기로 애초부터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인간이 자신들의 삶에 의미를 두고자 만들어낸 신의 이야기가 거꾸로 작동하여 그 만들어진 신 때문에 인간이 좌절되는 종교를 말하고 싶어서였다. 신의 이야기란 상상이고 그 바탕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것이 깔려 있는 건데, 그 상상이 실체가 되어 인간을 압살하는 형국이 되어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안에 우리 모두가 있음을...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자네의 말은 아무 쓸모가 없다네.”

장자(莊子)가 말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만 비로소 쓸모가 있음에 대해 더불어 말할 수 있다네.

무릇 천지(天地)는 넓고 또 크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발로 밟는 크기만큼의 공간일 뿐이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발의 크기를 측량하여 그 공간만 남기고

주위의 나머지 땅을 깊이 파 황천(黃泉)까지 도달하게 한다 치면,

그러고서도 발 딛는 공간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쓸모 있는 땅이 될 수 있겠는가?”     

《장자》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바라나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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