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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2.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4

인도에서의 삶을 카오스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질서가 없는 세계 혹은 무질서 속에서 나름 돌아가는 어떤 보이지 않는 질서 정도의 뜻으로 이해를 한다. 달리 말해보면, 서구 세계에서 흔히 보이는 종류의 문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고유한 뭐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말하는 사람들에 따라 달리 표현되지만, 어떤 이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몸이 익숙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데자뷔라는 걸 처음으로 피부에 닿게 느끼는 경험을 해봤다고도 하는, 뭔가 닿을 듯 닿지 않고, 못 닿을 듯 하면서 닿는 듯 한 곳인 것 같기는 한다. 단순히 오리엔탈리즘에 빠져 말하는 명상과 사색의 나라라는 의미는 아니다. 


서구의 세계관이 ‘그러하다’라고 한다면, 이곳은 ‘그러한 듯 하다’일 것이다. 규정적이고 단일적이고 규범적인 서구 세계관의 틀은 유화 같아서, 모자이크 같고, 뫼비우스 띠 같은 인도의 그것과는 누가 봐도 사뭇 다르다. 특히 모든 세계가 다 서구화가 된 지금이니, 그 단일화 된데에서 인도 세계를 보면 바로 그 ‘그러한 듯 한’ 세계관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세계 안의 세계와 세계 밖의 세계가 공존하다 보니 어느 한 쪽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기가 어려워지는 그 세계에서 인도를 본다. 상황에 따라 진리가 달라지고, 상대주의 요소가 너무 강하다 보니 거짓말에 대한 거부감이 쉬 합리화 되고, 양해되어버리는 그 세계에, 경쟁과 배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매혹으로 다가선다.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이런 인도적 세계를 사진으로 재현하고 싶은 생각을 사진 시작한 이래로 단 한 시도 빠지지 않고 오랫동안 가지고 왔다. 추상을 구체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자의적일 수밖에 없지만, 있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보다 보이지 않는 관념을 보이는 대상으로 의미화 하는 것이 긴장의 역습을 가져오는 쾌감이 있어, 쉬지 않고 작업을 계속 해오는 중이다. 어차피 예술이란 기존에 도전하거나 전통이나 관습에 저항하는 것이라 하니 그것으로서 나 혼자만의 만족감이 충분하면 된다, 더군다나 내 작업이 소위 작품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지도 않으니, 주저하지 않고 시도해본다.      


한 눈에 누가 봐도 어지러운 상태다. 저 많은 간판들은 그 어떤 것도 어떤 통일된 혹은 표준화 된 규범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두가 다 다르다. 그렇지만 그것을 그냥 단순히 다 다르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 다름은 옆과 주변의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수시로 계속해서  변화해 나간다. 외부에서 규제를 가하지 않으니 끊임없는 반복이 변화를 생성한다. 그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신 또한 그러하다, 라는 힌두교적 세계관을 닮았다.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란 게 가능하겠는가? 인간이 자연과 사회의 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의지로서 주체를 세우고 버티고 그것으로 헤쳐 나갈 수 있겠는가? 변화하는 운동의 상황은 인간을 매 순간마다 분해하고, 그러면서 존재는 하나의 고정된 것에서 벗어나 끝없는 생성이 일어나는 세계다. 존재 안에 잠재적으로 있는 차이는 주변과 상응하면서 또 다른 차이를 무수히 만들어내고 결국 새로운 것으로 생성되는 비실체의 세계로 바뀐다. 그래서 카오스라고 말하는 그 세계, 어지러운 듯 무질서인 듯 하지만 결국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반복-생성-변화...라는 운동이 어떤 원리를 작동하는 세계가 우리 눈앞에서 작동을 한다. 부지불식간에.      


사진으로 이러한 어려운 관념론을 보여준다는 것이 가능할까? 사진은 사진으로만 말을 해야 한다는, 받아들일 수 있기도, 받아들일 수 없기도 한 그런 사진의 성격 위에서 이런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사진을 한다는 것이 대상을 앞에 두고 사유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만들어 보면서 다시 사유하는 행위, 그것이라고 발설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어지러운' 간판들, 그것들로 끝없이 분할되는 저 공간이 변화와 생성하는 운동성의 세계를 말하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그 세계를 당신이 긍정으로 받아들이든 부정으로 거부하든 그것에 개의치는 않는다. 단지 사진으로 사유하는 사람으로서 세계가 획일적이거나 존재론적이지 않고 이질적이고 생성론적이더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내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는 이 세계관을 담기에 참 좋은 장면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사진하는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당신은 힌두교적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나눠 보고 싶을 뿐이다.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세계, 근본도 무의미하고, 기원도 무의미한 세계. 이성과 자아가 사유의 근원이 되지 못하는 세계. 당위성과 법칙성은 흔들리고 현실은 정주하지 않는 세계.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와 그 안에서 경계를 무너뜨리며 끝없이 변화하는 어지러운 이 시대의 모습을 저 인도 남부의 어떤 작은 도시 시장 입구에서 본다. 카메라가 없었으면 사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은 뭇 삶을 도취시킨다. 이런 것에 대한 욕망을 삼가라.     

《숫따니빠따》     

인도, 따밀나두, 뿌두쩨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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