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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3.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5

사진은 평면이다. 실재 현실은 입체고. 공간이 서로 다르면, 사실은 전혀 함께 존재할 수 없지만, 하나의 물리적 지면 안에 속할 수 있게 되는 게 사진이다. 오래 전 나온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말하는 그 사랑은 그런 물리학의 원리마저 깨버리는 신파극을 만들어냈지만, 사실 그런 서로 다른 공간에서 하나의 기능을 하는 예는 현실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차원 간의 소통을 하고 싶은 염(念)을 갖는 것은 사람이라면 장삼이사 누구든 몇 번의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만질 수는 없다더라도,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던 우리 엄니나 돌아가신 장모님이 꿈에 나타났는데, 분명히 돌아가셨는데 왜 집에 계시지 하는 의아심에 문고리를 놓아버리면 사라져버릴 것 같아 문고리를 끝까지 잡고 있었다는 며칠 전 아내의 눈물을 사진으로 그리고 싶었다. 함께 할 수 없는 어떤 안타까움 말이다.  

   

안개가 짙은 델리의 겨울,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무슬림 유목민 정복자들이 북부 인도를 평정하고 델리에 도읍을 정해 거대한 승전 탑 꾸뜹 미나르Qutb Minar를 세워 기념한 곳. 안개가 너무 자욱해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눈앞에 나무 한 그루가 극히 낮은 채도로 서 있는 반면 바로 눈앞에는 공원의 한 표지판이 아주 높은 채도로 서 있다. 표지판에는 영어로 출구라고 적혀 있지만, 그것도 중간에 잘렸는데 보통 사람들에겐 이상한 기호로 보일 힌디Hindi 데와나가리Devanagari 문자로 '출구'가 그 위에 ‘그려져’ 있다. 둘은 모두 이 공간의 맥락에서 이 사진을 보는 한국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생성하지 않는 기호다. 그래서 이미지로 나타난 이곳은 어떤 실체가 아니다. 거리가 떨어지면 차원이 달라지는 것인가. 이쪽에서 만질 수 있는 세계를 저쪽에서는 만질 수 없는 것이 되는가. 이쪽은 색色의 세계고 저쪽은 공空의 세계가 되는 것인가. 의미 없이 보는 절간 처마에 그려진 실담悉曇문자든, 의미 없이 듣는 불경 만뜨라mantra든 모두 신앙의 세계에서는 어떤 의미를 생성해주는 어떤 기호가 되듯, 저 둘의 관계를 눈으로 볼 때 갖지 못했던 느낌이 사진으로 보면 예기치 못하게 삐져나온다. 역시, 사진은 확실히 감각적이다. 그것이 실체 아닌 상상을 말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가 된다.    

 

실체와는 다른 어떤 세계는 카메라를 들고 말을 하고 싶은 욕구를 들게 한다. 그것이 실체가 아닌 허구일지라도, 글쓴이들이 글을 쓰고 싶듯, 카메라를 든 이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속내를 털어 나누고 싶다. 난, 이렇게 느꼈는데 당신은 어떻게 느끼셨는가? 같아질 필요도 없고, 그 차이가 어떤 일치를 봐야 할 것도 아니다. 실체가 아니니 그저 감각을 내던져보는 관념의 유희다. 의미가 소거되고 느낌만 왔다 갔다 하는 놀이, 현대인에게는 참 좋은 쉼터가 된다. 소통하는데 항상 의미가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무의미라는 것이 피해야 할 것이라면 규정 된 의미 또한 피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의미와 의미, 그 둘을 만나게 하려면 상징과 은유의 세계로 들어가면 될 듯 하다. 대승 불교의 스승 나가르주나Nagarjuna가 말하는 세계, 가버린 것은 가버린 것이 아니고, 가버리지 않은 것 또한 가는 것이 아니고, 가버린 것과 가지 않은 것을 배제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는 세계. 이러한 세계는 시의 세계에서 열린 느낌으로 주고받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건 아닐까. 돌아가신 이를 만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면, 그것으로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실체 없는 꿈이라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세계는 너무 슬프지 않을까? 도대체 왜 사는 것인데?    

 

꿈의 언어는 낯설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를 꼭 현실 세계의 언어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너무 삭막하다. 그것은 그리움이고 사무침이지 의미와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불가능의 영역은 그저 그대로 두어 알아 가면 될 일이다. 이해는 하지 못하지만, 기운은 통하고 그것이 소통으로, 치유로, 번져갈 수 있을 일이다. 있는 그대로 두는 상태, 그것이 공空의 세계이자 텅 빈 충만이라는 선禪의 세계다. 그 안에서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은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있을 뿐이다. 객관도 없고 증명도 없다. 짧고 강렬한 감정을 내뱉는 것, 어떻게 보면 소통하지 않음으로써 소통이 이루어지는 세계다. 그러니 목적이 없는 곳이지만, 지극히 인간다움의 세계다.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으며,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각각이 일종의 시각적 불확실성의 시초이며, 선에서 깨달음이라 일컫는 의미의 상실과도 비슷하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몸, 얼굴, 글쓰기라는 기표를 확실하게 순환시키고 교환하며 그 안에서 기호의 퇴각을 읽으려 한다.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인도, 델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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