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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Apr 23. 2019

사진으로 긷는 인문 36

카메라를 든 사람은 폭력적이 된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대상을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해석하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전유해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대상을 마음대로 연결시키거나, 자르고, 죽여 버리거나, 사라져버리게 하기도 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로 찍는 경우 폭력적 재단은 훨씬 배가 되는 게 이렇게도 찍어 보고, 저렇게도 찍어 보고, 온갖 방법으로 대상을 자유자재로 조리하기 때문이다. 이 사진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다가, 순간적으로 저 기인의 몸뚱아리의 육성肉性을 강조하고 싶어 머리를 잘라버렸다. 머리를 자른 통돼지 구이를 염두에 두고 한 나의 전유다. 저이가 무슨 존재이든 어떤 행동을 하든 나는 저이를 이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그 머리를 자르는 것이 윤리적인지 아닌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머리를 자르든 글로 머리를 자르든 그림으로 자르든 자른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사진이 가장 충격적이다. 세계를 보고 사유하고 이미지로 재현하는 자가 누리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지만, 사진은 다른 매체보다 훨씬 폭력적이다. 사진은 누가 봐도 직설적이고 리얼하기 때문이다. 내가 잘라버린 저 사람은 내 사진을 보는 모든 사람에 의해 영원토록 머리 잘린 사람으로 박제 당한다. 자신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세계를 재단하는 권력을 가진 자의 폭력이다. 카메라를 든 이가 세계를 전유하는 일은 너무나 짧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 행위가 별 어려움 없이 너무나 쉽고 편리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카메라라는 기계를 대동하여 만들어내는 사진, 너무나 무서운 도구다. 

    

머리를 잘라서 나는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가? 힌두 사회에서 저런 사람을 두고 사두sadhu라 부른다. 세상을 부정하므로 세상을 포기하고 떠나버린 사람이다. 산 속 깊이 들어가, 뭔지는 모르지만 진리를 찾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12년에 한 번 씩 저 장소에 모인다. 그 때가 되면 속세에 사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 저 사람들에게 축복을 구한다. 세상을 버린 사람에게 세상에 대한 축복을 구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하고 파라독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세계에 산다. 꼭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힌두교 기세棄世의 세계관에 대한 변명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소비화는 힌두 세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소비하고, 버림도 소비한다. 이미 인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소비 체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버렸기 때문이다. 난, 바로 이 욕망을 버리고 정진을 하는 세계관이 어찌 욕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가능한 지를 사유하고 싶다. 그들이 세계를 포기하고 떠남이 그렇게나 급진적이었으니 그대들의 그 정진이 세상에 오랫동안 울림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세에 대한 반성이고 나에 대한 반성이다.     


저이들이 수행하는 방식은 여럿 있다. 죄의 뿌리를 말에다 두는 이는 묵언默言정진을, 게으름에 두는 이는 불와不臥정진을 한다. 저이는 그 죄의 뿌리를 좆에 두었다. 그래서 그 좆을 극복하려 그 기능을 완전 마비시켜버렸다. 이제 좆은 단순히 아랫도리 어디쯤에 붙어 있는 한 살덩어리가 되어 있다. 거기에 끈을 묶고 온갖 기행을 한다. 긴 막대기를 그 살덩어리에 달고 그 위에 사람을 태우더니, 지금은 거기에 끈을 묶어 자동차를 끈다. 쉬바신의 염력이 함께 한다는 주문을 큰 소리로 염송하고서, 한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따라서 염송을 하나로 소리친다. 염송이 기합이 되어버렸다. 참으로 기이한  세계다. 굳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 못할 바도 없지만...     


욕망을 버릴 수 없음을 잘 안다. 욕망의 무한함 또한 잘 안다. 욕망의 속성을 잘 알면서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을 둘러싸는 모든 상황에서 인간답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라고도 본다. 인간의 의지로 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관계로 욕망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이 인간세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서 성공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성공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지가 뛰어나서가 아니고 그것을 달성하고 욕망을 잘 제어하고 그 상황에 잘 순응해서였을 것이다. 뭔가를 이루어 내지 못했을 때도 마찬가지가 된다. 난, 어떤 특별한 것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환상에 빠지지도 않는다.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할 때 변하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라고 믿는다. 욕망도 마찬가지고 성공도 마찬가지다. 다만, 상황에 따라 변할 뿐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도덕경》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알라하바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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