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8. 산요가 비쁘라요가 다르마흐 samyoga viprayoga dharmaḥ 會者定離
1980년대 활동했던 가수 산울림은 ‘사랑’을 직접 노래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더군요. 그들은 사랑 대신 이별이나 회상과 같은, 시간이 흘러가면 누구나 접해야 하는 슬픈 감정을 주로 노래하곤 했지요. 젊었을 땐 왜 그들이 사랑을 직접 노래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심정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사랑은 시간이 가면서 이별이 되고, 이 세상 누구도 그 시간의 이치를 외면하고 살 수 없으니, 사랑이란 결국 이별을 향하는 슬픔이고, 그 이별의 감정이 가장 원초적인 거라고, 생각해서 일 듯합니다. 그런데, 그 이별을 지금 우리가 사는 한 생 안에서 맞는 거라면, 마냥 슬픈 것이겠지만, 전생에서 이어져 오는 혹은 다음 생으로 이어져가는 과정의 일부, 라고 생각하면, 그 슬픔은 애써 가눌 수 있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겠지만, 모든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죽음과 이별의 슬픔을 문학이나 예술에서 즐겨 다루곤 하지요. 그 여러 종교 중에서도 힌두교와 불교가 이별을 슬프지만 아름답게 잘 다루는데 탁월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윤회라는 무한 반복의 시간관을 가지고 있어서일 겁니다.
힌두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의 이치를 성스러움의 세계와 속된 세계의 차원에서 주로 다룹니다. 이에 비해, 불교에서는 이별의 슬픔을 순환하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이치로 승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힌두교에서 죽음으로서 이별에 대한 신화는 매우 많지만, 인도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신화인 [라마야나]의 마지막 장면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슈누의 화신인 이상 군주 라마(Rama)는 악마를 물리친 후, 납치되어 악마의 손아귀에 있었던 아내 시따(Sita)를 되찾아 왕궁으로 금의환향하는데, 백성들이 시따가 악마에게 유괴당한 후 정절을 빼앗겼는지 모른다며,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결국 운명적으로 재회하지만, 백성들의 의심으로 인해 다시 끝내 이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의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고 영원히 헤어지는 죽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 장면이 이렇습니다.
“만일 제가 일편단심 남편만 생각하며 살았다면, 어머니 대지 여신이시여, 저를 받아주소서”라고 시따가 외치자, 땅이 갈라지고, 대지 여신이 황금 연꽃 수레를 타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시따는 그 위에 올라 조용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시따는 원래 대지 어머니 여신의 딸로 태어나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러니 죽어서 다시 그 원초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이 과정을 해석해보면, 세간이 자기의 성성(聖性)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것에 저항하여 성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는 뼛속 깊은 브라만 신학자들이 만든 여성 순결 메시지를 담은 종교 신학의 신화지요. 어떤 이는 이를 페미니즘 차원에서 여성 존엄성을 지켜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던데,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역으로 전적으로 남성에 대한 종속적 가치의 강화라고 봐야지요. 종교학 차원에서 보면, 시따가 택한 죽음으로서의 이별은 단순한 이별이라기보다는 속된 세상과의 이별 혹은 신성으로서의 회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장면은 힌두 신화에서 가장 슬프면서 가장 숭고한 이별 장면으로 꼽힙니다. 그만큼 죽음과 이별 그리고 성스러움이 빚는 영향이 컸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힌두교에서의 이별은 불교에 가서 훨씬 정서적인 이별의 모티프로 발전합니다. 지금은 이별하지만, 이별은 전생에 쌓은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로 정해져 있어 그런 거고, 그러니 어찌할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이로써 끝이 아니어서 다음 생에 다시 꼭 만나기로 하자, 그리운 그대여, 라는 식의 슬픔을 대하는 태도가 불교문화에서 찬란하게 꽃피우지요. 이별을 아름답게 문학적으로 승화한 대표적인 작품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 지은 ‘제망매가(祭亡妹歌)’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 이렇게 이별해야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극락에서 다시 만나자고 애써 기원합니다. 이런 불교의 윤회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이별을 자연의 법칙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인 거지요.
힌두교에서부터 출발한 순환 시간의 원리를 중국에서 이렇게 번역해서 만들어 일종의 격언으로 삼은 것이 ‘회자정리’입니다. 사실, 이 회자정리의 이치가 구체적인 말씀으로 남은 것은, 붓다에 의해서였습니다. 붓다는 그 인생 말년, 열반에 들기 전, 많은 제자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때 제자 아난다Ananda가 눈물을 흘리며 존귀하신 분을 이 세상에서 다시 뵐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붓다가 그 답으로 한 말이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법이다. 이는 영원한 진리다.”랍니다. 여기에서 만남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뜻의 명구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 ‘회자정리’는 때로는 거자필반(去者必返)으로 또 때로는 생자필멸(生者必滅)로도 표현됩니다. 만나면 헤어진다는 이치를 한자 4자성어로 만든 게 회자정리(會者定離)입니다. ‘회자정리’는 그 말 그대로 고대 힌두교나 불교의 경전에 나온 성어는 아닙니다. 가장 비슷한 게 있다면, 이 붓다의 말씀이 몇몇 경전에서 산요가 비쁘라요가 다르마흐(sanyoga viprayoga dharmaḥ), 즉 ‘만남이 헤어짐이 되는 건 법이다.’라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