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9. 마야 Maya 幻


근대 인도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 영혼의 스승이라고 하는 스와미 비베까난다(Swami Vivekananda)가 강연 때 자주 예로 든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죠. 누군가에게 마야를 설명할 때 꺼내는 이야기입니다. 신화에서 가져온 이야기지요. 신선 나라다(Narada)가 힌두 최고의 신 비슈누에게 물어봅니다. 주여, 마야란 무엇입니까? 왜 세상이 실재가 아니고 환상이라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비슈누가 조용히 웃으며 말합니다. 좋다.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하자. 가다가 내가 물 한 모금만 가져오라고 하면, 그 부탁을 잠깐 들어주면 된다. 사막을 걷던 중, 비슈누가 나라다에게, 이 근처에 마을이 있으니, 가서 물 한 그릇만 떠 오라고 했습니다. 나라다는 마을로 갔고,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오는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반하게 됩니다. 그녀와 말을 나누고, 얼마가 지나 결혼하고, 둘 사이에 자녀가 태어나고, 시간이 흘러, 그는 사업을 벌여 성공한 후 땅과 집과 종과 가축을 소유한 부유한 삶을 삽니다. 그러다 어느 날, 거센 폭우와 홍수가 몰려와 그의 집을 덮치고, 가족과 재산과 모든 게 다 물에 휩쓸리고, 그 자신도 거의 죽을 뻔합니다. 그가 절망에 빠져 울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립니다. 나라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비슈누가 서 있습니다. “물은 어디 있느냐, 나라다?”, 나라다가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슈누는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그것이 마야다. 단 한 순간, 네가 물을 뜨러 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지. 그게 마야다.”


'마야',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이야기 하나를 더 들어보실까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이론 힌두교 세계관을 널리, 펼친 스승 중의 스승인 샹까라짜리야(Shankaracharya)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우리 불교에서 많은 이야기가 원효와 관련되어 전해지듯, 힌두교의 많은 이야기는 이 스승, 샹까라짜리야와 관련되어 만들어지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샹까라짜리야가 대중들에게 잘 파고 들어갔다는 말이겠지요. 어느 한 남자가 해 질 녘에 길을 걷다가 뱀처럼 보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뒤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는 그것이 밧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뱀으로 보인 존재를 마야라 하고, 그 뱀을 브라흐만이라 합니다. 즉, 모든 변화하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마야라 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변화하지 않는 어떤 본질을 브라흐만이라 합니다. 마야를 마야로 보지 못하는 건, 아위디야(avidya) 즉 무명(無明) 때문이니, 궁극적으로 우리는 무명 속에서 세상을 잘못 파악하고 산다는 의미지요. 갖가지 이름과 형태의 현실 세계를 마치 무슨 본질 혹은 진리인 것처럼, 착각한다는 말입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면, 어떻게 하면 그 착각에서 깨어나고 환상은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이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브라흐만’ 항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야’는 한자어로 ‘幻’ 혹은 ‘幻像’이라 번역합니다. 가장 쉽게 이해하는 건, ‘꿈’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인도에서는 꿈이 마야인 건 사실이지만, 그 꿈을 깨고 난 현실도 마야라고 한다는 거지요. [라마야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어보시지요. 왕자 라마는 한때 천변만화하는 현실이 고통이라고 여겼고, 그 고통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이를 위해 브라흐만을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지 깊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스승이 이런 말을 합니다. 옛날 옛적, 어떤 브라만 한 분이 깊이 명상하다가, 이상한 환상을 경험했답니다. 자신이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왕이 되어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온갖 쾌락을 즐기면서, 태어났다가 죽고 다시 태어났다가 죽는 윤회를 경험하는 자기 모습을 봤답니다. 그리고서는 갑자기 명상의 자리에서 깨어났답니다. 왕자시여, 그 꿈이 마야지만, 그 꿈을 깬 지금 이 세상도 마야입니다. 그 왕국이 실재가 아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모든 존재도 환영일 뿐입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중국에서 장자가 꿈을 꾸고 나서 보니 꿈속에 나비가 나인가, 내가 나비인가, 라고 문제를 제기한 건, 꿈과 실재에 관한 담론이고 이를 비교해보면, 힌두교 세계관에서는 꿈도 꿈이고 실재도 꿈이니, 우리가 감각적으로 사는 세계는 모두가 다 꿈이라는 겁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찰나마다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변화 자체가 마야이니, 그것은 본질 브라흐만이 반영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힌두 시간관에서 말하자면, 겁과 찰나로 말할 수 있는데, 본질은 겁이고, 마야는 찰나라는 겁니다. 그 둘이 끝없이 순환하는 우주적 질서에서 인간 존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변화 즉, 생-노-병-사, 혹은 좀 더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혁명, 계급, 권력, 입시, 의사-판검사, 성공-실패 등은 모두 실체가 아닌 그림자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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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정 마야인지, 아닌지, 사실, 저는 모릅니다. 마야인지 아닌지 그것을 분별하는 일에도 별 관심 없습니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 종교인이라면 당연히 이 문제를 그 어떤 것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겠지요만, 저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범인에게는 별로 해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우리 앞에 놓인 의미 있는 한 가지에 대해서 숙고는 합니다. 세상을 전적인 마야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헛되고, 모두 다 사라지는 것이라고는 봅니다. 그래서 저는,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망가뜨리고 남을 해치면서까지 움켜쥐려 하지는 않습니다. 젊었을 때, 했던, 어떤 것을, 옳은 것이라 규정하고 가르침이란 이름 아래 남에게 강제하는 삶을 더는,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세상이 조금 더 평화로운 세상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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