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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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10. 목샤 Moksha 解脫

이 글의 주제, 목샤(moksha)란, '해탈'입니다. 그런데 그 '해탈'의 정의와 의미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크게 달라집니다. 원래는,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거였지요. 그래서 풀고 벗어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탈(解脫)이라고 한자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해석은 우주 본질의 완전한 지혜를 깨닫는, 우빠니샤드에 나오는 ‘범아일여’나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와나(涅槃)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 즉 세상살이 속에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해탈을 이룰 수 없지요.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마야로 즉, 다 헛되고, 무가치한, 곧 다 사라져버릴 안개와 같이 보는 시각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 안에서 윤회의 길을 가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일에서 초탈해야 이룰 수 있는 그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언뜻 보면 말이 안 되겠지만, 그들 특유의 아드와이따 즉 불이(不二)의 관점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해탈과 윤회는 달리 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세상살이를 버릴 수 없는, 그렇지만, 해탈을 이루고 싶은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세상살이를 부인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 온갖 수행을 통하여 그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지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게 되는 거지요. ‘불이’로 해석하면, 그 두 방편이 충돌하여 싸움이 날 일은 없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되는 거지요. 후자로 보는 새 관점은 해탈을 인식론으로 보지 않고, 종말론적으로 보는 겁니다. 신학자들이 규정한 사회를 지탱하는 어떤 율법에 순종하고, 그에 따라 충직하게 잘 살면 다음 세상에 극락을 보장하게 되는 거지요. 이는 전형적인 종교 행위입니다. 그 극락에 왕생하는 것이, 곧 해탈이 되는 것이고, 그 극락왕생하는 방편은 율법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중 종교의 길이지요. 그 율법에 순종하는 것의 핵심은 신을 독실하게 모시고 따르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러면 힌두 신화의 두 장면을 통해 어떻게 해탈의 개념이 달라지는지 한 번 살펴보지요.


우선 초기의 입장을 여전히 유지하는 이야기를 한 번 보시지요. 옛날 옛적에 한 왕이 살았는데, 왕좌를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수행에 몰두합니다. 숲에서 경건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그는 강에서 떠내려오는 어린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구해줍니다. 그리고 그 사슴에 대한 연민과 애착에 깊게 사로잡힙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사슴을 염려한 탓에, 죽어서 사슴으로 환생하게 됩니다. 그는 전생에 쌓은 수행 업보 덕에 사슴으로 생을 마친 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서는 세속적인 일에 더는 집착하지 않고, 완전히 벗어나는 삶을 살게 되지요. 그리고서는 마침내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깨달음을 통해서만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초기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이야기보다 더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세요. 옛날 옛적 어떤 왕 한 사람이 살았는데, 독실한 비슈누 신봉자였지요. 그는 나라를 율법에 따라 통치했지만 사소한 무례한 행동으로 어떤 신선(리쉬)의 저주를 받아 다음 생에 코끼리로 태어났답니다. 코끼리가 된 생에서도 그는 독실한 비슈누의 숭배자였는데, 어느 날 악어에게 다리를 물려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 죽게 되었는데, 그 일보 직전에 비슈누 신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했답니다. 그러자 그의 믿음에 기뻐한 비슈누가 나타나 악어를 죽이고 그를 구해줬는데, 그로서 그는 윤회에서 영원히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되었답니다. 신을 독실하게 믿는 게 곧 해탈이라는 새롭게 변화한 관점입니다.

힌두교의 세계관은 비단 이 ‘해탈’뿐 아니라 모든 개념에서 크게 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한 것, 서로 다른 것을, 모두 인정하고 공존합니다. 변질이네, 이단이네, 하면서 배척하지 않습니다. 나중의 견해가 처음의 견해와 정반대의 것이라 할지라도, 이럴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고, 라고 받아들이지요. 윤회라는 무한 시간관 위에서 세워진 아드와이따 즉 불이적 일원론이니까요. 한국 사람들은 ‘해탈’을 불교를 통해 접하였지요. 그러니, 일부 초기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해탈’을 붓다의 관점, 즉 힌두교의 우빠니샤드의 입장과 궤를 같이하는 ‘깨달음’의 결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인도에서 크게 변화하여 한국으로 들어와 우리 불교의 모태가 된 대승불교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은 극락왕생을 해탈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여기에서 극락이 바로 번뇌와 고통이 없는 해탈의 최종적 세계입니다. 대중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진리란 누군가가 찾고 발견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 봅니다.

제가 그린 그림을 찬찬히 봐보세요. 얽히고설킨 게 끊어질 수 있다고 보입니까? 저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으니, 반드시 ‘끊어야 한다.’라는 당위성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삶을 인식론으로 보는 것이고, 저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온갖 게 덕지덕지 쌓여 있으니 끊을 수 없다, 그 자체로 사는 것 그 삶이 곧 해탈이라고 보는 현실을 중시하는 사람은 종말론으로 보는 겁니다. 추상화는 자신이 가지는 세계관으로 이미지를 해석하는 겁니다.


13.4./250921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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