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플레이를 마치며
영화 테넷에서도 몇 번이나 나오는 대사처럼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설령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꾼다고 해도 말이다. 정해져 있는 세계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닐까.
가령 지구온난화 같은 거대한 문제 같은 경우, 인간은 몇십 년 전부터 그 위험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위험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했다. 이런 거대한 사건들은 어쩌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태양은 언젠가 적색거성이 되어 지구를 삼킬 것이고, 우주는 원자 단위까지 흩어져 열사망에 이른다. 우주의 운명은 작은 행성의 생명체 하나가 어떤 행동이나 결심을 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거대한 종말의 운명에 짓눌려 절망한 채 살아야 하나?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아니라고 답한다. 무슨 짓을 해도 특정 사건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다 해도 매 순간 조금이라도 더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의 결과로 작게는 친구가 생길 수도 있고, 크게는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다.
인간이 안드로이드의 인권에 대해 고려해야 할 시점이 언젠가는 꼭 일어날 일이라면, 미래의 동료들을 위해 하루라도 더 빨리 내가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안드로이드 시점의 게임이다) 그렇게 되면 그 시점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고, 그만큼 미래에 고통받을 안드로이드의 숫자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폭넓은 선택권으로 캐릭터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게임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했듯이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있다. 가령, 마커스는 안드로이드의 자유를 외치기 위해 폭동과 시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여론과 인간의 입장을 고려하여 평화적인 시위를 선택했다.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같은 자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주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폭력적으로 대응했다면 인간은 겁을 먹고 모든 안드로이드를 파괴했을 것이고 다시는 안드로이드를 만들지 말자는 법을 통과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면 인간은 그 역사를 지우고 이제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또다시 안드로이드를 만들었을 것이다. 안드로이드에게 자아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같은 갈등을 몇 번이나 반복할 것이다.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 에서 마커스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인해 목숨보다 신념, 동료를 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선택했다.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신념, 동정, 정의'를 보여준다면 인간들은 동요할 것이니까. '안드로이드에게 자아가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지도 몰라.' 마커스가 분신한 순간 과거 인간들의 자기희생을 떠올릴 것이다. '희생'은 많은 영화들의 클라이맥스에서 등장한다. 주인공의 희생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 같기도 하다. '이 정도로 희생을 했는데 세상에 평화가 안 오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약자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자기희생은 쉽게 잊히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약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공포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희생이 덧없지 않다. 분명 그 용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인생이 바뀌는 사람도 있다.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 무언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그래서 힘이 있다.
다시 돌아가 거대한 역사 속에서, 나아가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한 인간이 일생동안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 자신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긍지. 또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소망이다. 거대한 흐름을 바꿀 수는 없어도, 일어날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없다 해도 우리는 그 시기를 조금이나마 앞당기거나 미룰 수 있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나를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최대한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인생을 보낼 수 있다. 겁쟁이로 평생을 살아왔더라도 어느 한순간 비겁한 나를 참을 수 없어서 한발 내디뎠을 때 역사가 바뀌진 않을진 몰라도 나 자신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