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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강하 Feb 26. 2019

완성도보단 취향으로

내가 영화를 고르는 방법

"전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해서요."


내 말을 듣던 선배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10대 후반. 모든 의견에 당당했다. 평생 변하지 않을 거라 장담했다. 창작활동을 하겠다는 사람 입에서 나와선 안 될 말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땐 아마도 영화를 많이 접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허세


이후 누구나 그렇듯 영화를 마구잡이로 보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일본 영화를 굉장히 많이 보았다. 우에노 쥬리를 좋아해서 보게 된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달린다'를 시작으로 어이없는 일본 특유의 개그 감각이 담긴 영화를 주로 보다가 많을 사람이 그렇듯 '카모메 식당'을 시작으로 음식을 주제로 한 영화를 줄곧 찾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너무 비슷한 영화들만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예매율 1,2위에 올라있는 영화도 보지 않고, 평론가들이 훌륭하다 평한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니고. 주류의 세상에서 조금, 아니 많이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만 맛보다가 다른 맛있는 음식이 있는 줄도 모르면 너무 억울하니까. 그런 마음으로 이동진 기자가 평점 5점 준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평점이 높은 영화들은 왜 그렇게들 우울할까? 파괴적이고 인간의 고뇌와 모순을 담고, 영화를 보고 며칠 동안 고뇌에 빠지게 하게 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그래, 왜 좋은 영화인지 알겠다. 음. 훌륭하군. 그걸 일 년 정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난 평점 높은 영화랑 안 맞아.


그래서 좋아하는 영화들만 보기로 했다. 어차피 살아있는 동안 영화를 봤댔자 얼마나 보겠나. 억지로 훌륭한 영화를 보느니 내가 좋아하는 것만 즐기는 게 맞다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내 취향이 뭐냐고? 



첫 번째,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영화


주인공들이 갈등을 겪거나 어려움에 빠진 장면을 잘 보지 못한다. 영화관에서야 억지로 보지만 집에서는 10초 뒤로 버튼을 자주 누른다. 최근에 이런 증상을 '공감성 수치 장애'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들이 험난한 여정을 겪거나 갈등이 뒤범벅된 상황 안에 놓인 영화들을 보기 힘들어한다. 실제로 체력적으로도 힘들다. 그래서 주로 보게 되는 영화들이 한때 유행했던 일본 힐링 영화다. 어처구니없는 주제들을 가지고 유쾌하게 풀어낸 장면들은 가볍게 웃으면서 볼 수 있어서 좋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텐텐, 인스턴트 늪, 딱따구리와 비 등이 있는데 이들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못된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진짜 악인이 없어서 내 머릿속의 이미지로는 일본엔 죄다 이상하지만 좋은 사람만 있다는 인상이 남아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런 영화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나도 저렇게 좀 살아볼까 하고 느슨한 마음이 생기는 것.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한국에서 숨이 막힌다면 한 번쯤 말도 안 되는 일본의 힐링 영화를 보자.



두 번째, 음식 영화


'카모메 식당'을 시작으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모든 영화를 전부 보았다. 이 감독의 특징은 영화 안에서 음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특히 '메가네(안경)'에 반해버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음식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니 나의 취향에 정말 딱 맞아 들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동진 기자는 2.5점을 줬더라. 하하) 그리고 그 영화 때문에 요론 섬에 찾아가게 되었고, 그것이 브런치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정도로 인생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 말고도 달팽이 식당이라는 영화도 꽤 좋아한다. 요리 하나하나를 재료부터 자세히 보여주는 점과 동화 같은 화면이 마음에 들었다. 식당에 테이블이 단 하나라는 말도 안 되는 설정도 좋다. 그런 설렁설렁한 설정이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데운다. 


'우동'이라는 영화도 내게 꽤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화를 본 후 우동에 꽂혀서 우동집이 새로 생겼다 하면 찾아가 꼭 먹어보고 '우동'이 배경이 된 동네를 찾아가기도 했다. 정성스럽고 열정적인 음식에 대한 태도는 왠지 모를 감동을 준다.



세 번째, SF영화


앞의 두 취향과는 반대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다. 과학적 사실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SF 말고, 공포물과 적절히 혼합된 영화 말고, 우주 미아가 되었다가 간신히 돌아온다는 뻔한 이야기 말고. 정말 새로운 이야기. 와! 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장 최근에 그런 충격을 준 영화는 '컨택트'였다. 동일 작품명의 97년 작품도 좋아했지만(엄밀히 말하자면 콘택트이다) 16년작의 컨택트는 그야말로 영화를 보며 경이감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 영화였다. 외계 생명체를 구현한 방식도 세련되었고, 외계어를 배우는 과정도 엄밀하게 자문을 받아 촬영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디테일 하나하나에서 감탄을 하게 하고 이전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 후, 원작을 읽어봤는데 역시나 그 책의 모든 이야기가 훌륭했다.


'루퍼'도 좋다. 시간여행을 다루는 작품으로 다른 시간여행 작품들에 비해 소재가 신선했다. 시간여행으로 인해 생기는 모순을 표현하는 방식도 재미있었고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 있는 스토리도 마음에 들었다.


뻔하지만 '인셉션'이나 '매트릭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영화들은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흥미진진해서 느긋하게 앉아서 볼 수가 없다. SF야 말로 오락으로 즐길 수도 있고 액션도 화려하면서 볼거리도 충분하고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는 장르계의 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천편을 넘게 볼 정도로 마니아인 친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어두운 영화나 고전 영화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 또한 취향을 말했고, 우리는 서로 정 반대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라며 서로 왜 그것들을 좋아하는지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백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개의 취향이 있다. 그리고 그 취향이 같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로 인해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취향을 스스로 찾는다는 것에 있다. 누가 좋다고 해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그렇게 좋아진 영화들은 의미가 있다. 물론 처음엔 추천에 의해 볼 수밖에 없겠지만 취향을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보고 듣고 읽어야 비로소 나만의 취향이 확고해진다. 이제 겨우 영화의 취향을 찾은 나는, 지금은 책의 취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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