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롭지엥 Oct 31. 2020

진짜 영국여우를 마주친, 그 할로윈

앞집 할아버지와 친구가 된 이유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어두운 골목을 헤매었습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조금 전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북적이던 골목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내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직 가로등 불빛과 나의 핸드폰 조명뿐이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그 어둠 속에서 저는 진짜 영국 여우를 만나게 됩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영국 여우. 이솝우화에 나오던 그 여우를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 말입니다.

남편이 출장만 가면 저에게는 '일'이 생깁니다.

그 징크스가 생긴 건 할로윈 부터 였습니다.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동네에 친구도 없고, 어색하고 낯선 우리의 첫 번째 할로윈이었습니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픽업하여 집 앞 골목을 들어서는데, 공용 마당에서 이웃으로 보이는 엄마와 아이들이 할로윈 분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앞집에 살고 있는 가족이었고, 할로윈 이벤트로 동네 이웃들이 모여서 아이들과 함께 사탕을 받으러 다닐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흔쾌히 앞집 여자는 우리 가족을 할로윈 행사에 초대해주었습니다.


우리는 7시까지 모든 준비를 하고 공용 마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다섯 가족이 모였고,

깜찍한 꼬마 마녀로 변신한 첫째와 귀여운 호박 옷을 갖춰 입은 둘째는 이색적이고 새로운 경험에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사탕바구니가 가득 차 더 이상은 사탕을 받을 수 없을 정도까지 동네를 순회했습니다.

7시에 시작한 사탕 받기의 여정은 9시가 다 돼서야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다며, 이렇게 이웃이 되어 너무 행복하다며 굿바이를 외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 주머니에 집 열쇠가 없다.....


영국의 대부분의 주택에서는 집 열쇠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주머니에 분명 넣어두었던 집 열쇠가 없습니다.


주머니 양쪽을 뒤져보고 혹시나 흘렸을까 집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도대체 열쇠는 온데간데없습니다.

아이들은 춥다며 떨고 있고, 남편은 스웨덴으로 출장을 가있어 지금 당장 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아....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급한 마음에 앞집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이들을 잠깐만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절한 앞집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걱정하며,

빨리 가서 찾아보라며 우리 아이들을 맡아 주었습니다.


얼마나 헤매었던 건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실성한 사람처럼 핸드폰 라이트를 땅바닥에 더 가까이하며 샅샅이 뒤졌습니다.


일행도 없이 익숙지 않은 나의 새로운 동네를,

그것도 어둠 속에서 바닥만 보며 열쇠를 찾고 있자니 이제는 정말 무서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열쇠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점점 진짜 '귀신'이나 '동물'이 나올 것 같은 공포가 느껴졌습니다.



그때, 진짜가 나타났습니다.


여우. 진짜 여우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으악! 저거 저거 뭐야!! 여여여.. 여우다!"


영국에는 여우가 길고양이처럼 흔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영국 여우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을 무서워해요)


그 길로 줄행랑을 쳐서 도망쳤지요.

겨우 다시 앞집 엄마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진정되지 않습니다.

 "못 찾았어, 나 어떡하지."

앞집 엄마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더니, 열쇠 수리공을 부를 수 있는데 야간 출동 출장비만 200파운드

(한화 30만 원 정도)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옆 집에서 할아버지가 손전등을 들고 나오십니다.

'이안'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할아버지는 울고 있는 저를 토닥이며 너무 걱정 말라고, 내가 도와주겠다고 같이 찾아보자고 하십니다.


열쇠를 잃어버려 동네를 헤매는 여자가 있다는 소식이 벌써 이 동네에 쫙 퍼진 모양입니다.






이안 할아버지는 저와 함께 한 시간을 '수색'을 하셨습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눈물 섞인 염소 목소리로 Thank you를 얼마나 말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찾지를 못하자,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주택의 집주인이 살고 있는 곳을 가보자고 합니다.

(저희는 월세로 살고 있었어요.)


분명히 비상키를 가지고 있을 테니, 그 열쇠를 받으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집주인은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고 마스터 키를 받아오는 것으로 할로윈의 대소동은 막을 내렸습니다.


11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간 집.

한껏 들떴던 아이들은 엄마의 열쇠 분실 소동으로 녹초가 되어버렸습니다.


2시간 동안 열쇠 수색을 한 저는 다리도 아팠고, 다행히 집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어!!!!!  잠깐! 저건 집 열쇠잖아!!!


2시간 동안 울면서 가슴 졸이며 밤거리를 헤매던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식탁에 얌전히 놓여있는 열쇠.


열쇠를 땅에 흘린 것이 아니라, 아예 들고나가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문을 안에서 잠근 상태로 그냥 외출을 했던 것인데, 한국의 현관 자동번호키에 익숙해져 있던 저는 습관처럼 열쇠를 들고 밖을 나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열쇠를 다른 곳에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가슴 졸이며 어두운 골목을 뛰어다녔던

이 열쇠 대소동이 허무했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할로윈 열쇠 소동 이후로 저는 따뜻한 이웃의 친구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풍성한 꽃다발 두 개, 감사카드 그리고 초콜릿 두상자를 사서

고마웠던 그 날의 할로윈의 동지들(앞집 엄마와, 앞집 할아버지)에게 감사인사를 전했습니다.


이안 할아버지는 신문에 한국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스크랩을 해서 저희 집 우편함에 넣어주었는데,

그 마음이 고맙고 따뜻했습니다.


앞집 엄마의 보살핌과 이안 할아버지의 동행.

너무 두렵고 무서운 상황에서 저는 순간의 희망과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기꺼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나의 이웃처럼

어둡고 힘든 길 안에서 방황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저도 따뜻한 동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나의 영국 이웃들들로부터,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전 13화 소금과 설탕을 사용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