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서울을 선택 한지가 벌써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남편이 이야기들을 풀어봅니다. -탈 서울-

by 고강훈

chapter 4. 탈 서울을 선택 한지가 벌써 10년이 지났다.


자고 나니 2억


분명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자고 나니 나는 출근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기사와 방송에서 뉴스를 접하면 집값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나와는 먼 이야기이지만 뉴스를 접하면 부러움을 금치 못하는 즐거운 비명으로 들린다. 물론 주택 소유자일 경우이다. 세입자 경우라면 지옥 아닌 지옥을 하루하루 경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전세금을 올리려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되나? 머릿속은 이미 혼돈의 상태이다.

누구나 속사정은 있겠지만 한쪽은 웃고 한쪽은 울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아주 웃픈 현실 속에 마주하며 살아간다.


내가 서울을 떠난 지는 10여 년이 지났다. 2010년 추운 겨울 마지막으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안녕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대학 졸업 후 서울 드림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입성을 했다. 타 지역에서도 잠깐 살기도 했었지만 서울에 가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지방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부터 서울 소재에 있는 대학을 다녔었더라면 자연스레 정착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진 못했다. 하지만 지방 국립대를 다니며 등록금 걱정을 조금이나마 들어 드리게 된 것이 효도 아닌 효도를 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IMF를 만났고 군대를 다녀와 얼른 졸업 후 취업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언제까지 부모님의 등골이 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부터 취업문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2004년 당시에는 벤처기업 열풍이 일고 있었고 신입보다는 경험 있는 인재를 많이 선호하였다.


사회에서는 졸업장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초년생을 믿고 실무에 투입시키기란 기업의 사용자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라 본다. 인재 양성에 초점을 둔 기업이라면 충분히 투자도 가능하겠지만 이상과 현실은 많이 다르다. 기업은 이윤창출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강남구 역삼동 빌딩 숲을 헤매며 눈을 크게 뜨고 10여분을 찾아 물어물어 건물 앞을 도착을 하였다. 건물들이 다 비슷비슷하다.

높은 빌딩에 웅장함과 위압감을 느끼며 긴장과 흥분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런 건물에서 일하면 나도 서울 사람 되는 거겠지?”


면접장에 도착했다. 내가 면접 보는 회사는 IT회사 중 이름이 있는 회사이다.

100곳에 이력서를 넣어 봤고 면접을 수 십 차례 봤지만 내가 본 회사 중 규모 있는 회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의 면접 차례가 다가왔고 이름을 호명하면 순서대로 들어가서 다대 일로 면접을 진행하는 형식이었다. 집단 면접보다는 오히려 나을 수 있겠다 싶었다.


“자... 다음 고강훈 씨 들어오세요”


긴장을 풀고 들어 가보지만 입은 바싹바싹 마르고 좀처럼 긴장이 안 풀린다.

내 앞에는 이미 면접관님 5분이 앉아 계신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동시에 나에게 눈 맞춤을 하면서 미소를 넘겨주신다.


“고강훈 씨 앉으세요, 멀리서 오셨네요”


면접 진행을 맡은 분이 오프너로 나를 편안하게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미 긴장한 상태로 나의 포커페이스는 노출되고 말았다.


“자... 긴장 푸세요. 형식적이지만 자기소개 간단하게 해 보시죠”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머릿속에 정리 한 대로 기계적으로 읊어 대기 시작했다. 중간에 실수로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말았다.

얼굴이 빨개지고 내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부끄럽기보단 망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면접자께서 나에게 말을 건넨다.


“오늘 면접자 중에서 강훈 씨만 지방대네요”

“네 이렇게 면접의 기회를 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고 면접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합격 소식은 듣지 못했다. 다니고 싶은 회사였지만 나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을 것이므로 인정한다. 사실 이 회사를 다녔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테지만...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그렇다. 그날 면접 후 긴장이 풀려 그 회사 화장실에 들어섰는데 면접관과 나란히 마주쳤다.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건네셨다.


“강훈 씨, 강훈 씨는 왜 면접에 왔다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습니다”

“강훈 씨의 스펙으로 면접을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이력서의 자기소개서 때문에 면접 기회가 주어진 겁니다”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야 되나 우울해야 되나 한 동안 멍해진 기분으로 건물 밖을 나섰던 기억이 있다,

기회는 만드는 것이다.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잡지를 못했다. 아니면 이미 정해진 결과였을까? 인생의 교훈을 또 한 번 배우게 된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다시 노력하였고 졸업 직전 겨우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나의 직장은 대기업 협력업체에서 출발을 하였고 컴퓨터과학 전공을 살려 프로그래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국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앞만 보면서 달렸던 기억만 남는다.

출근길 지하철역에서는 나보다 더 빨리 뛰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면 뭐가 그리 급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참 열심히 사는구나 생각도 들었다. 어느새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뛰고 있는 나를 보았다.

신도림역과 가산디지털단지 역을 지날 때면 더욱 긴장하며 만감이 교차된다.

출근 후 매일 똑같은 하루 속에서 모니터를 보며 변하지 않는 코드를 보고 바라보게 될 것이고 풀리지 않는 코딩 실수는 줄담배를 부르게 될 것이고 며칠 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밤새 해결하며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박수를 치며 혼자 희열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나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엇을 채워나가야 하는지 모른 채 수동적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개발자의 삶이었지만 좀처럼 나의 꿈과는 반대로 가고 흘러가는 듯했다.

새로 투입되는 프로젝트들을 완료하면 그간 고생했던 나에게 리프레쉬 휴가와 성취감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조금씩 성장을 하고 있구나 느낄 때가 많았지만 갈 길은 많이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을지도 모른다. 지금 개발자의 대우와 환경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내가 근무할 당시의 개발자의 삶은 워라밸보다는 열정 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세대였기에 그만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일은 흥미롭고 재미가 있었지만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고민도 되었고 시간에 쫓겨 살아가고 있었기에 가슴속 한 구석에 해소되지 않은 응어리가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이때부터 내가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항상 고민하고 했던 것 같다. 막상 일을 박차고 사표도 못 던질 거면서 배운 도둑질로 먹고사는 밥벌이 수단으로 퇴색해버리고 만다.

큰소리치며 성공하고 당당하게 고향을 찾으려고 한 젊은 패기의 나는 어디 갔을까?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사람을 만나고 가정을 만들고 화목하게 살면서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나의 꿈은 어디 갔을까?

여기서 평생 집은 장만을 할 수 있을까? 전셋집이라도 구할 수는 있겠지?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나의 자존감은 바닥이었고, 한 동안 나의 미래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 일도 하기 싫었다. 답답한 마음을 위로해 줄 뭔가가 필요한 시기였다.

사실 비겁하게 나를 합리화하기 위한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환상과 기대 속에서 거창한 나의 포부와 계획은 채 이루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숨 막히는 몇 년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가족이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 냄새가 나는 마음속 여유를 찾아 진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니라고 생각되면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 넌 아직 젊으니”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살아가는 방법이 있어. 난 네가 꼭 전공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이 들어. 겁먹지 말고 그냥 시작해 보려무나.”


교수님 말씀대로 2010년 12월 겨울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난 나의 모습은 쓸쓸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난 탈 서울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직 젊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고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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