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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강훈 May 24. 2024

두 생명과 함께 다시 태어난 아내

두 생명이 태어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명도 다시 태어났다. 나에게 2019년 7월 30일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날이다.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기 싫지만, 행복한 기억도 있었기에 되짚어 본다.     


쌍둥이를 임신한 지 36주 6일이 되었다. 아내는 조금이라도 뱃속에서 더 키우고 싶어 했다. 쌍둥이라 조산의 위험이 있어 태아보험도 가입을 하지 못했다. 쌍둥이라 단태아보다 체중이 작게 태어남을 알기에 아내는 인큐베이터보다는 엄마의 뱃속에서 하루를 더 머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를 참고 버티며 이날까지 온 것이다. 37주 1일이 되는 날이 예정일이었으나 아기들도 둘 다 머리가 아래로 잘 자리 잡고 있었고 며칠 더 참기로 의사 선생님과 상의 후 결정을 하였다. 게다가 자연분만까지 가능하다는 말에 아내는 더 힘을 내어 버틴 것이다.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쯤 37주 4일에 아내는 복통을 호소했다. 결국 응급으로 산부인과에 입원하였다. 긴 복통 끝에 병원에 지시에 따라 검사를 받고 긴급출산으로 변경이 되었다. 아이들이 머리 방향을 바꾸어서 계획이었던 자연분만은 제왕절개로 변경되고 말았다. 그 비좁은 틈에 한 녀석이 머리 방향을 바꾼 것이다. 복통 속 아내의 힘겨운 호흡은 잠시 멈추었고 잔잔한 숨소리만 남았다. 아내의 얼굴은 긴장과 불안한 얼굴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침대 아래에서 아내를 지켜보는 것, 그리고 다 잘될 거라며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침이 밝았다. 긴급으로 첫 시간 때의 수술로 잡혔다. 시간이 다가와 간호사와 나는 조용히 침대를 밀고 수술방 앞까지 다가갔다. 이 같은 상황을 몇 번 만났지만, 오늘만큼은 행복의 문이 열리길 간절한 마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내와 눈을 맞추며 아내를 의사 선생님께 맡겼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의료진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수술방 문이 닫히고 정적과 함께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린다. 너무 고요하다. 금방이라도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내 심장 소리인지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너무 떨렸고 십 분이 한 시간 같은 기분을 느꼈다. 끊었던 담배도 피우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한 시간 가까이 불안과 긴장의 연속에서 헤맬 때쯤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응애~ ” 그리고 1분 뒤 또 “응애~” 하며 울어댔다. 세상의 첫 빛을 본 감격인지 엄마와 탯줄이 떨어져 무서움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녀석들은 힘차게 울어댔다. 다행히 둘 다 크게 울어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요함의 정적을 깬 녀석들과 첫 만남이 다가왔다. 이내 수술방 문이 열렸고 간호사는 바구니에 누워있는 신생아 둘을 확인시켜 주었다.

“9시 56분 출생, 아들,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 이상 없죠?”

“네”

“9시 57분 출생, 딸,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 이상 없죠?”

“네”

이 말을 듣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이면서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아내를 빨리 보고 싶은 생각에 발가락 손가락을 제대로 세어 볼 겨를이 없었다. 그 상황에 하나둘 하고 있을 정도의 정신이 멀쩡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간호사의 “이상 없죠?” 말 한마디만 듣고 믿었던 것 같다. 산모가 건강하게 나오길 바랄 뿐이었다. 아이들은 신생아실로 옮겨졌고 나는 회복실로 올라가 아내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병실에 오니 정신이 들기 시작했고 가족들은 서로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산모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제왕절개를 하면 아랫배에 흉터가 생긴다며 울먹이던 아내는 홀로 차가운 수술방에서 담담히 이겨내고 있었다. 아내가 병실로 돌아왔다. 제왕절개를 한 탓에 출혈이 심하다며 간호사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한 사람만 정신을 못 차리고 비몽사몽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내다. 마취가 풀리지 않은 상태 아내의 기분은 아무도 모른다. 그 마음도 모른 채 병실은 의도치 않게 축제 분위기로 변하고 있었다. 출산도 잘했고 산모도 눈앞으로 돌아왔으니, 가족들은 이보다 더 기쁠 일이 없지 않은가? 축하전화와 꽃다발이 도착하고 있었다.     


구급차




그런데 아내가 무척 힘든 표정이다. 황급히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마취가 풀리고 출혈을 많이 해서 추위를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하혈이 멈출 때까지는 힘겨울 거라고 했다. 조그만 지나면 회복될 거라며 중간중간 패트를 잘 갈아주라는 당부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여보, 나 추워”

아내의 말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런데도 계속 춥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내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이불을 여러 겹 덮은 데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내 곁에 온풍기까지 작동했지만, 아내의 얼굴은 변화는 없었다. 패드를 갈려고 이불을 들치니 아내가 누운 자리에 생각보다 많은 출혈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겁에 질려 떨린 목소리로 간호사를 재차 불렀다. 간호사가 확인 후 다녀갔지만, 별다른 조치는 하지 못했다. 제왕절개를 하면 이 정도의 출혈은 한다는 말과 찌꺼기 분비물이 나온다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고 담당 의사를 불렀다. 수술방에서 나온 의사는 상태가 심각함을 확인 후 급히 아내를 회복실에서 응급조치실로 이동을 시켰다. 긴박한 상황이 돌아가는 것은 분명했다. 아내가 출혈을 너무 많이 하여 체온이 떨어져 구토 증상을 일으킨 것이다. 응급으로 수혈을 시작했으나 하혈은 멈추지 않았다. 수혈하는 중간에도 출혈이 지속되어서 속수무책이었다. 의사도 최선을 다했지만 당황한 모습이었다. 고통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아내와 지혈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의사의 모습이 두 눈으로 보고 있는 내가 너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의사의 판단에 119를 불렀고 응급조치는 계속되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19구급차가 도착을 했고 아내와 나는 차에 올랐다. 담당 주치의도 함께 올랐으며 인근 대학병원까지 함께 하였다. 1분 1초가 긴박한 상황이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가는 차 안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파랗게 질린 나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병원이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심하게 뛰고 있었다. 눈물은 말없이 계속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학병원에 도착을 했다. 산부인과에서 긴급이라는 연락을 받은 의료진들이 응급실에 모여 있었다. 의료진은 아니지만 그 모습만 봐도 긴박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산부인과 주치의는 차트와 함께 인계를 마치고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인사와 함께 멀어져 갔다. 당시에 아내 곁에 빨리 안 나타났냐며 주치의를 많이 원망도 했지만, 긴박한 상황에서도 응급조치를 잘 해준 의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응급실에 들어선 나는 여러 개의 동의서에 사인을 내용도 모른 채 하고 있었다. 자세히 알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만 같아 물어보지도 않았다.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할 상황이었고 해야만 응급진료가 시작될 것 같았다. 여러 종류의 검사를 마치고 혈관 조영술을 통해 출혈부위를 찾아내어 그 부위를 막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시름을 놓게 되었다. 하지만 정확한 출혈의 원인은 찾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아내는 산부인과 병동으로 이송이 되었고 모두가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되는 출혈과 수혈로 인해 쇼크까지 찾아온 아내는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심장박동이 줄어들고 수분이 빠진 상태에서 물을 달라고 외치는 아내가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점점 심박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담당 의사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출혈의 원인은 ‘색전증’이라고 했다. 그리고 힘겹게 한마디를 더 꺼냈다.

“보호자님,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온몸에 전율을 느꼈고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복도에 앉아서 기다리시는 부모님, 장모님 때문에, 다리에 있는 힘을 주고 버텼다. 상황을 눈치챈 부모님과 장모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머리를 숙이며 기도하는 장모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울음을 참으며 의사 선생님께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옷깃을 붙잡았다. 신생아실에 있는 두 아이를 생각하면 아내를 살려야만 했다. 아직 아기들을 만나지도 못했기에 상황이 잘못되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흡연을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담배를 얻어 부들부들 떨면서 담배를 연거푸 태웠던 기억이 난다.

여러 개 주삿바늘이 꽂힌 아내 곁에서 10시간 넘게 지혈하며 자리를 지켰다. 의료진과 보는 이가 지쳐 갈 때쯤 아내의 심박수가 차츰 올라오기 시작했고 정상 수치에 가까웠다. 아내는 탈진한 모습에 가까웠다. 안심하기에는 이르지만 다음 날 아침까지 무사히 고비를 넘긴다면 중환자실로 갈 수가 있다고 했다. 아침까지 잘 싸우고 잘 버텨준 덕분에 아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중환자실에 보호자는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간호사에게 상황을 엿들을 수 있었다. 10개가 넘는 주삿바늘을 꽂고 온 환자는 처음이라면서 놀라기도 하였다. 조금씩 호전되어 의식이 돌아온 아내는 중환자실에서 꼬박 일주일을 지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도왔다. 자유를 찾아 죽을힘을 다해 북한 땅을 벗어났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기는 너무나 아까운 운명이었다. 다행히 기적 같은 회복으로 무사히 퇴원을 하게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고 진료를 도와주신 산부인과 의료진과 특히 도움을 많이 주었던 옥녕씨와 중환자실의 간호사님들께 이 시간을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아내가 산후조리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산모가 있어야 할 곳으로 당연히 왔어야 했지만, 너무 힘겹게 돌아온 것이다. 신생아실의 유리 벽 넘어 모습을 비춘 쌍둥이 남매를 본 아내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산가족보다 힘겨웠던 일주일만의 모자, 모녀 상봉이었다. 2019년 7월 30일 아이의 엄마와 아들과 딸은 같은 날 함께 새로운 인생이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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