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아빠 일기 - 15편(26년 3월)

어떤 패배가 남긴 길

by 강남 아빠 일기

아들,

이틀 전 아빠는 주간 풋살 모임에 나가 2시간 동안 경기를 치르고 왔어.

5대 5로 풋살이었고, 지는 팀이 이긴 팀 음료수값을 내는 소소한 내기 경기였어.


큰돈이 걸린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런 날은 다들 더 진심이 되더라. 한 골에 더 아쉬워하고, 한 번의 실수에 더 크게 반응하게 되니까 말이야.


이기기도 전에 이긴 기분

경기 전 분위기는 꽤 좋았어.

양 팀을 놓고 봤을 때 우리 팀 실력이 조금 더 낫다고 자평했고, 경기 시작 전에 잠시 모여 전략회의도 했거든. 게다가 본 게임 전 연습 경기에서도 우리 팀이 2대 0으로 이겼어. 아빠도 한골을 넣었지.


그때 이미 우리 마음속에는 말로 꺼내지 않은 확신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아.


"이 정도면 되겠지. 오늘 승리는 우리가 가져가겠지."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완전히 딴판이었어.


2대 0, 3대 2, 2대 2, 2대 1.

전력상 크게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팀이 실제 경기에서는 계속 끌려다녔단다.


불편한 말이 사라질 때

경기 초반엔 팀 분위기가 살아 있었어. 서로 위치를 잡아주고, 공격 방향을 이야기하고, 수비 가담을 독려했지. 그리고 필요하면 불편한 말도 할 수 있었지. 팀 스포츠를 하다 보면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해.


“왜 거기서 패스를 안 주냐.”
“중앙 공간 안 보이냐.”


듣기엔 날카롭지만, 적어도 그 순간엔 팀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어. 서로가 틀린 걸 보고도 그냥 넘기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경기가 진행되고 체력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게 바로 그 말들이었어.

잘못된 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게 됐고, 틀린 걸 봐도 바로잡지 않게 됐어. 겉으로는 조용해졌지만 실제로는 팀이 각자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지.


좋은 말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필요한 말이 사라지는 게 더 무서웠어. 팀이 살아 있다는 건 칭찬이 많은 상태가 아니라, 불편해도 꼭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거든.


서로 소통하며 경기를 풀지 못하니 급한 순간 판단이 흐려지고, 판단이 흐려지니 경기 전에 세웠던 계획이 금세 사라졌어. 결정적인 찬스에서 슛이 빗나가고, 수비가 엇갈리고, 그렇게 조금씩 끌려다니기 시작했지.


잠깐, 우리가 살아났다.

그래도 지난 경기가 내내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니었어.

첫 본게임을 2대 0으로 완패당하고, 둘째 게임도 2대 0으로 끌려가며 흐름이 완전히 넘어갔다고 느낀 순간, 아빠가 팀원들에게 말을 꺼냈어.


“힘들어도 한 발씩만 더 뛰자.”
“서로 말을 더 하자. 지금 우리 너무 조용해.”


아주 대단한 말은 아니었어. 새로운 전략도 아니었고, 특별한 전술 변화도 아니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단순한 말이 그 순간에는 먹혔어.


다들 숨이 차 있었지만 다시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고, 공을 받기 전에 위치를 알려줬고, 수비할 때도 한 발씩 더 따라갔어. 아까까지는 각자 버티고 있었다면, 그때는 다시 팀처럼 움직였단다.


그리고 정말로 흐름이 바뀌었어. 한 골을 따라가고, 또 추가로 한 골을 넣으면서 “어, 아직 끝난 게 아니네” 하는 기분이 생겼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빠는 분명히 느꼈어. 우리가 못하는 팀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에겐 경기를 다시 붙잡아올 힘이 있었다는 걸.


그런데도 결국 우리는 졌어.

왜냐하면 그 상태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어떤 패배는 길을 남긴다

우리 팀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던 게 아니야. 힘들수록 더 많이 말해야 한다는 것도, 한 발 더 뛰어야 한다는 것도, 흐름이 넘어갈수록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심지어 그게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까지 경기 안에서 잠깐 확인했지.

그런데도 졌단다.


살다 보면 이런 패배가 더 오래 남아. 몰라서 진 패배보다, 알면서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해 진 패배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런 패배로부터 더 많이 배우게 돼.


내가 어디에서 무너지는지,
무너질 때 무엇이 먼저 사라지는지,
그리고 다시 살아나려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야.


어제 우리에게 그 길은 거창하지 않았어.

한 발 더 뛰자.
한마디 더 하자.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


문장은 단순했지만, 그게 팀을 잠깐 다시 살렸어. 그날 아빠는 알았단다.


끝까지 해내는 힘은 의지만으로 버티는 게 아니라, 몸이 같이 버텨줘야 유지된다는 걸. 체력이 떨어지자 말이 줄고, 말이 줄자 판단이 흐려지고, 판단이 흐려지자 계획이 사라졌으니까.


무너질 때 필요한 것

아들,

언젠가 너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왜 못 했지?” 하는 날을 만나게 될 거야.


그럴 때 스스로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하지 않았으면 해. 그건 네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아직 흔들릴 때 돌아오는 법을 몸에 충분히 익히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아빠는 네가 늘 이기는 사람보다, 무너질 때 다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지치면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고, 조용해지면 다시 필요한 말을 꺼내고, 잘될수록 오히려 더 자신을 점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주 눈부시진 않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아.

어제 경기에서 아빠는 졌어. 하지만 그 패배 덕분에 다음번 우리가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는 조금 더 선명해졌단다.


중요한 건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야.
흔들릴 때마다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


성장이라는 건 어쩌면 특별한 재능보다 다시 돌아오는 힘과 더 닮아 있는 건 아닐까?


오늘도 몇 번이나 걷기를 시도하다가 짜증을 내고, 또 금세 다시 시도하는 너를 보며, 사랑하는 아빠가

2026년 3월 17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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