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마트에서 두 개의 봉지가 하나로 묶이는 걸 보았다
봉짓살 터질 듯 끌어안으며 시작된 절박한 동거
원 플러스 원은 고개 숙인 것들의 사랑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빠르게 지나간다. 꼭 영화나 드라마 같다.
이런 안락한 의자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본 게 얼마 만인지 재수는 생각해 보았다. 지금 처한 상황이 쓱쓱 지나가는 풍경처럼 비현실적인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건 생경한 풍경이 볼만하기도 했지만 또 옆에 앉아서 껌을 딱딱, 소리 나게 씹고 있는 정숙이 내내 못마땅한 게 이유이기도 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괜찮은 일자리가 있다는 얘기에 한걸음에 달려왔더니 정숙이 직업소개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껄끄럽기는 정숙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을 쥐어 뜯기자 발악을 하던 정숙이 손톱으로 그은 상처가 아직 재수의 이마에서 아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정숙과 재수는 사장으로부터 대충 들은 일의 특성이나 어려움보다 한 공간에서 서로를 견뎌 낼 일이 더 심란했다.
“내가 만나봤는데 이상한 사람 아니야. 뭐,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사이코,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냥 적당히 눈치 보면서 하라는 데로 시늉만 해. 일단 최저시급보다 많이 준다니까 괜찮잖아? 저번에 티브이 보니까 기네스북에 도전하는 사람들 나오더구먼, 뭐 그런 거로 생각하면 돼. 못 견디겠으면 관두면 그만이고. 아마 당신들보다 그 여자가 먼저 포기할 거야. 둘이 쌈질만 하지 마, 난 그게 젤 걱정이야!”
직업소개소 사장이 운전을 하며 뒷좌석을 향해 진심 어린 당부를 했다. 정숙과 재수는 서로 외면한 채 사장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하며 불안증세를 보이는 재수 옆에서 정숙은 손가락을 벌려 엉킨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병원은 가본 거야? 의사가 뭐래?”
사장이 백미러로 재수를 보며 물었다.
“입원하라는데, 거기서 그렇게 죽기는 싫어요.”
“심각한 거야? 돈 때문이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내가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은 병원이야, 무료로 치료해 주는 곳인데 왜?”
“걱정 마세요. 아직도 술이 땡기는 걸 보니 아직 한 참 멀었어요.”
“애들을 봐서라도 이제 좀 달리 생각해 봐.”
“그게 가능했으면 지금 이 차에 올라타지도 않았어요.”
사장은 걱정 어린 얼굴로 백미러에 비친 재수의 안색을 살폈다. 그때 정숙이 갑자기 생각난 듯 큰소리로 물었다.
“근데, 그 집에서 담배 펴도 돼요?”
사장은 신호를 기다리는 중에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정숙을 쏘아보았다.
“식물이 담배 피우는 게 말이 돼?”
사장의 가시 돋친 말에 정숙은 기가 죽어서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재수를 보았고 재수는 통쾌하다는 듯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사라는 서둘러 청소를 했다. 특히 발코니에 있는 화단을 깨끗이 정리했다. 흙이 묻은 채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뒹굴던 물뿌리개, 분무기, 모종삽, 지지대를 닦아서 정리해 두었다. 모종들이 들어있던 비닐 화분들을 모아서 버리고 주변을 깨끗하게 쓸고 닦았다. 사실 그때까지도 사라는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정말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있을까 의심했고 사람을 구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사장이 정숙과 재수를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사라는 이제 이 큰 짐이 현실이자 자기만의 몫이 됐다는 걸 실감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사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편집장님.”
“아직도야?”
“죄송해요. 며칠 더 걸릴 거 같아요.”
“그러니까 그거 몇 푼이나 번다고 남이 쓴 원고 교정이나 보고 있어? 중앙지 신춘문예 출신이면 뭐 하냐? 얼른 시집 내서 이름 좀 알리고 그러다 잘 팔리는 산문집도 내면 좀 좋아? 신춘고아라는 말 있잖아, 그게 딱 이 작가라니까. 데뷔는 그렇게 화려하게 해 놓고 혼자 떠돌잖아. 무슨 결벽증 환자도 아니고, 그만하면 훌륭하다고 해도……, 그 좋은 시들을 혼자만 싸안고 세상에 내놓지를 않으니.”
편집장의 말을 사라는 잠자코 들었다.
“듣기 싫은 거지? 이런 말 하는 나도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고칠 게 그렇게 많아?”
“맞춤법, 띄어쓰기는 뭐 그렇다 치더라도 앞뒤 문장이 맥락이 없어요. 비문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려요.”
“그렇게 공들인다고 공동저자로 이 작가 이름도 같이 올려주는 거 아니야.”
“최대한 빨리 끝내 볼게요. 연락드리겠습니다.”
편집장과의 통화는 매번 이렇게 일방통행이었다. 꼭 며칠 입 다물고 살다가 날 받은 것처럼 속사포로 하고 싶은 말 다 뱉고 결국은 사라의 ‘노력해 볼게요.’ 혹은 ‘빨리 끝내 볼게요.’로 끝나는 게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사라는 이 불편한 기분이 또 하루를 다 잡아먹겠구나, 생각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사장이 바쁘다는 핑계로 정숙과 재수를 밀어 넣듯 문 안으로 들여보내고 돌아섰다.
뭔가 뻘쭘해하면서도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을 빛내며 낯선 이들이 사라의 거실에 앉았다.
정숙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껌을 딱딱, 소리 나게 씹었다. 재수는 모자를 눌러쓰고 바닥에 앉았다. 사라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정숙은 거실과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살림들이 보였다. 거실 선반 위에 놓인 결혼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남편이 있구나, 그런데 남편도 이 일을 허락한 건가? 천생연분인가 보네.’
정숙은 갑자기 사라가 부러웠다. 발코니가 정숙의 눈에 들어왔다. 기다란 화단을 한참 뚫어지게 보던 정숙은 피식, 웃었다. 정숙의 웃음소리에 바닥만 보고 있던 재수가 고개를 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숙을 보았다. 그리고 정숙의 눈짓을 따라 화단을 본 재수의 입에서도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라가 커피를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소파에 앉으세요.”
“옷이 더러워서……, 소파에 냄새 밸까 봐요.”
재수는 사라의 권유를 뿌리치며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게졌다.
“향이 좋네, 이거 콜럼비아산? 내가 커피는 좀 알거든, 압구정 살 때 커피 많이 내려 봤지.”
정숙이 잔을 들어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캬, 역시 좋다, 좋아. 역시는 커피는 드… 롭, 아니 두…릅?”
정숙의 뜬금없는 허세가 분위기를 더 삭막하게 만들었다. 긴 침묵에 커피를 홀짝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재수는 낡아빠진 야구모자를 내려쓰고 고개를 숙인 채 때 꼬장물이 줄줄 흐르는 구멍 난 양말의 솔기만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노숙 생활을 했을 거라고 짐작하고도 남을 만했다. 얼굴은 까맣게 타 있고 몸은 말라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아무런 희망도 의지도 배어 나오지 않는 남자의 외모는 마지막으로 목욕을 한 게 언제인지 궁금할 정도로 머리가 떡이 져 있고 몸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그런 외모와는 별개로 눈빛은 선명했고 막다른 골목에서 뭔가 희망의 불씨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상기돼 있었다. 그 눈빛이 사라의 마음에 들었다. 정숙은 또 어떤가? 검고 긴 파마머리는 단정치 못하게 풀어져 있었다. 감추고 싶은 게 민낯인지 아니면 마음인지 헷갈리게 여자의 화장은 지나치게 두껍고 밝았다.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은 빗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다 못해 무례했다.
정숙은 다시 발코니에 있는 화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가 내 종착역인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인데,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나라도 이건 아니지 않나? 지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도망치듯 나가버릴까?’
그녀는 착잡한 마음으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떠올리고는 담배 연기를 내뱉듯 긴 한숨을 쉬었다. 거실에는 깡마르고 병약해 보이는 재수와 눈치없고 천박해 보이는 정숙 그리고 사라, 셋이서 식어가는 머그잔이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무겁고 긴 침묵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소리라고는 정숙의 질겅질겅 껌 씹는 소리뿐이었다.
“딱딱!”
그녀가 껌을 씹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어색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경쾌했고 어떤 노래를 갖다 붙여도 박자를 맞춰줄 것처럼 리듬을 타고 있었다.
“어려운 결심 해주셔서 감사해요. 쉽지 않으셨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사라가 어렵게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