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정숙과 재수

by 나무

돌아오는 길에

별자리에 들지 못해 혼자 떠 있는 별

하나를 끌어 가슴에 안았다






“계약사항과 규칙들을 적어봤어요. 의견 있으시면 참고할게요.”


사라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든 정숙은 성의 없이 대충 살펴보았다. 이에 반해 재수는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어보며 종이를 넘겼다. 이런 재수를 한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정숙이 입을 뗐다.

“어려운 결심은 무슨……,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아니다, 먹고 죽자고 하는 짓인가? 호호호, 어렵네, 세상에 안 해본 일이 없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이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결국……, 근데, 피차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고 쓰여 있긴 해도,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미라……. 사장한테 대충 들었는데 저기 저 화단에 들어가 있으면 돈 준다는 거 아녜요? 물만 마시고 먹지도 말고, 그러다 깨꼬닥! 하면 송장도 치워주나?”

정숙은 사라의 안색을 한 번 살피더니 계속 속사포처럼 말을 쏟았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우리 같은 촌것들을 데려다 땅에 묻어놓고 죽어가는 꼴을 본다는 건지, 생긴 건 아주 순진하게 생겨서 벌레 한 마리도 못 때려잡게 생겼는데……. 우리 고용주님이 뭘 모르시는데 사는 것에 별 미련 없는 인간들 세상에 널렸어요. 높은 데서 떨어지거나 목매는 것보다야 이게 훨씬 부드럽지. 높은 데서 떨어지면 울퉁불퉁한 곳에다가 막 부딪칠 수도 있고, 목을 매면 혓바닥이 한 자는 밖으로 나온다는데……, 진짠지 거짓말인지 몰라도, 그건 좀 아니지,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사라는 대답 대신 머그잔에 있는 커피에 마른 입을 적시고 발코니에 있는 텅 빈 화단으로 눈길을 돌렸다.


“불편하시면 언제든 그만두셔도 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의지로 계시면 됩니다.”


정숙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다시 집어 들더니 손가락으로 밑줄을 그었다.


“고용주에게 사적인 질문은 삼갈 것. 화단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전의 생활 방식은 버릴 것. 할 것, 삼갈 것, 또 할 것, 할 것, 또 삼갈 것……. 이건 뭐 사람이기를 포기하라는 건가?”


“네, 말하자면 그런 거예요.”


사라의 단호에 말투에 정숙이 흠칫, 놀랐다.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재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약속하신 일당은 제가 드린 계좌로 꼭 입금 부탁드려요. 이혼한 아내 통장인데 애들이 셋이에요. 학원비에 뭐에 돈 들어갈 일이 많아서 힘들 거예요. 내 앞가림도 못하고 살면서 남편 노릇, 아비 노릇도 못 했어요. 몸도 병들고, 어디라도 가서 막노동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그가 입을 여니 오랜 세월 버려져 있던 술독처럼 찌든 술 냄새가 풍겼다. 말하는 동안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끝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분위기가 왜 이래? 어디 초상났나? 그나저나 우리 이제 미우나 고우나 한 집에서 동거동락할 사이인데 최소한 통성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아요? 나 아직 계약서에 싸인 안 했으니까……, 우리 고용주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하며 살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데, 그 뭐냐, 영화에서 본 톱 들고 사람 죽이는 그런 사람은 아닌 거 맞죠?”

정숙은 씹던 껌을 손으로 잡아서 늘리고 다시 입에 넣기를 반복하다가 아예 입 밖으로 꺼내서 돌돌 말아 머그잔 받침에 올려두었다.

“왜 그런 거 많이 나오잖아, 사람 가둬놓고 밥도 안 죽을 만큼만 먹이면서 고문하고 실험하고, 입에 테이프 붙여놓고 소리도 못 지르게 하고 말이야.”


정숙이 갑자기 울상을 하며 자기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안 돼, 내가 딴 건 다 참아도 말은 못 참아! 설마, 그런 거 아니죠?”

사라가 어쩔 줄 몰라 두 사람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잠자코 있던 재수가 볼멘소리로 화를 냈다.


“젠장, 잠자코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는 돈 받으면 그만이지.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닌데, 어딜 가나 천대받고 사람 취급도 못 받는 팔자가 뭐 그리 가리는 게 많아? 그리고 동거동락이 뭐야? 무식하기는……, 동고동락도 모르니…….”


소파에 앉아있던 정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뭐가 어쩌고 어째? 살다 살다 별 그지 같은 놈을 다 만났네. 야, 이 개자식아!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그래, 내가 동거 좀 했다. 네가 나 동거하는데 뭐 살림이라도 보태줬어? 죽을 날 받아놓은 인간은 질문도 하면 안 되냐?”

재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질세라 소리를 질렀다.

“당신 같은 부류의 여자 하고는 말 섞고 싶지 않으니 그만해!”

“섞긴 뭘 섞어 이 인간아! 내가 별별 놈들하고 몸은 섞었어도 너 같은 구린내 풍기는 인간하고는 비위가 상해서 겸상도 안 해!”


정숙은 실성한 사람처럼 사지를 흔들며 악다구니를 쓰다가 재수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었다. 사라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앙칼지게 말을 쏟아내는 정숙과 느릿느릿 할 말은 하는 재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휴, 시발! 어딜 가나 저런 달린 놈들이 문제야.”

“뭐? 달린 놈들? 여자라는 것들이 남자처럼 무게 중심이 없으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덕을 부리지. 그저 돈이면 환장하는 종자들! 지겹다, 지겨워.”

“헐, 이제 잘하면 한 대 치겠구나, 한 번 쳐봐 쳐보라고! 어차피 이판사판 죽을 날 받아놓고 사는 인생인데 뭐가 무서워? 빨리 한 대 쳐봐, 당장 경찰 부를 테니.”

“당신이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고 다녔는지 그 바닥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아.”

재수가 정숙을 때릴 기세로 한 손을 쳐들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아이고, 이놈이 사람 죽이네. 살다 살다 이제 이 그지 같은 놈 손에 내가 죽나 보다.
평생 재수가 없더니 죽는 것도 내 원대로 못하고……, 내가 어디서 굴렀던 달렸던 대체 네가 뭔 상관이야?”

정숙은 급기야 꺽꺽, 우는 소리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재수의 멱살을 잡자 그도 이에 질세라 멱살 잡던 손을 머리로 옮겨 움켜잡았다. 드센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부여잡고 싸우는 광경을 사라는 이렇게 가까이서 처음 보았다. 어떻게 말릴 틈도 없고 시작부터 이런 난관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측을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집 천장에 구멍이 났나, 아니, 하늘이 노해서 여자와 남자가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 곳을 향하여 물벼락을 내린 건가? 어디선가 센 물줄기가 여자와 남자를 향해 쏟아졌고 한 몸처럼 섞여 몸싸움을 하던 이들은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아악! 대체 이게 뭐야?”

물을 뒤집어쓴 여자는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쥐어짜며 소리쳤다.
남자는 그저 물이 흥건한 마룻바닥에 망연자실 널브러져서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듬성듬성 빠져서 휑한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두 사람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사라가 양손으로 긴 호스를 들고 벌겋게 얼굴이 상기된 채 서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그 작은 체구에서 황소가 뿜는 듯한 콧김 소리가 집 안에 퍼졌다.

“당신, 미쳤어?”

정숙은 마스카라가 번져서 검은 물이 줄줄 흐르는 눈으로 사라를 흘겨보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행여 일 시작도 전에 잘리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됐는지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말했다.

“제기랄, 벌써 원 없이 물을 처마셨으니……, 먹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당신 이마빡에 잎새기라도 나면 다 내 오줌 덕분인 줄 알아, 인간아!”

재수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이하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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