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처치곤란과 메론빙수

by 나무

민들레를 보고 아무도 민들레야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면 이름만 남을까 봐





처음에는 화단의 흙을 모종삽으로 펐다. 하지만 고작해야 채소나 화초 모종을 심을 때 썼던 모종삽으로는 두 사람이 들어갈 만큼 파는 게 쉽지 않았다. 너무 힘을 주어서인지 모종삽이 금세 휘어졌다. 사라는 삽을 한쪽에 던져두고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채 양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둥글게 모아서 마치 굴삭기처럼 깊게 구덩이를 파 내려갔다. 이런 사라의 모습을 정숙과 재수는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찡그렸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한 번 들어와 보세요.”

정숙이 먼저 성큼 발을 들어 구덩이로 들어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수도 그녀를 따라서 옆에 나란히 섰다. 사라는 구덩이를 팔 때와는 다르게 퍼낸 흙을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담아 천천히 그들의 발 위에 얹었다. 흙이 발가락 사이로 들어가자 정숙은 간지러운지 연신 킥킥대며 웃었다. 발등을 덮은 흙은 점점 발목을 지나 어느새 무릎까지 차올랐다. 사라는 손으로 꾹꾹, 흙을 눌러 단단히 다졌다. 화단에 심어진 두 사람은 낯선 나라에 여행이라도 온 듯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흙 속에서 발가락을 꿈틀거리기도 하고 몸을 비틀기도 하면서 두리번거렸다.

“자, 이제 된 것 같아요.”

사라는 장갑을 벗고 옷에 묻은 흙을 털고 나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목에 건 수건으로 닦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발코니 끝에 있는 붙박이 창고 속에서 팻말 두 개를 들고 왔다.

“각자 맘에 드는 이름을 정해 보세요. 새로운 이름으로요.”

사라가 네임펜과 팻말을 정숙과 재수의 손에 건네주었다.

“아이고! 새 이름이라니, 한 번도 생각 못 해봤는데…….”

재수는 팻말과 펜을 들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인데, 내 주제에 새로운 이름이라니……. 처치곤란한 인생한테는 이름 하나도 버거워요.”

재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숙이 눈을 크게 뜨고는 재수와 사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처치곤란! 그거 좋네! 입에 짝짝 달라붙네. 호호호, 당신 좋아하는 사자상어 같네.”

“어휴, 저런, 사자상어라니…….”

정숙이 손뼉을 치며 말하자 재수가 한숨을 쉬었다.

“냅둬, 이렇게 살다 죽게.”

정숙이 재수에게 손사래를 치며 쏘아붙였다.

“난 메론빙수!지금까지 먹었던 것 중에 제일 맛있어. 모양이 얼마나 이쁜지, 세상에 요걸 어찌 먹누 하면서도 껍질만 남기고 게 눈 감추듯 먹었으니까. 혹시 알아? 다음 세상에서는 메론 나무로 태어날지.”

정숙이 눈앞에 진짜 메론빙수라도 있는 것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사라는 처치곤란과 메론빙수 이름이 쓰인 팻말을 흙 위에 꽂았다.

“뭐, 자랑스러운 이름은 아니지만 내가 내 이름을 스스로 짓는 게 기분이 이상해요.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랄까.”


재수가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크크크, 처치곤란으로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해.”

메론빙수는 눈을 찡긋거리며 약을 올리듯 말했다.

메론빙수도 축하해 줘야겠네, 먹음직스러운 메론빙수가 된 걸…….”


“뭐? 먹음직? 어디서 침을 흘리고 지랄이야! 또 한 번만 음탕하게 위아래로 훑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메론빙수와 처치곤란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새 이름 덕분인지 모처럼 활기 있어 보였다.

둘은 흙에 발을 묻고 서 있는 게 마냥 신기한지 낄낄거리며 웃다가 흙을 한 움큼 집어서 서로에게 뿌리기도 하면서 물놀이하는 애들처럼 좋아했다.

“물은 하루에 세 번 드릴게요. 일조량이 적어서 블라인드는 걷은 채로 지내도 될 거예요.”

사라는 천장에 부착된 건조대에 종을 걸었다.

“언제든 불편한 게 있으시면 이 종을 울리세요.”

화단에 심어진 처치곤란과 메론빙수를 바라보던 사라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흙 속에 발을 묻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걱정하는 마음을 읽은 메론빙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편하긴 뭐가 불편해요? 흙 속에 발 담그고 있으니 엄마 품처럼 포근한데, 아! 아니다, 엄마 품은 모르겠고 사내 품처럼 그냥 좋다.”

자기도 모르게 말을 뱉고 나서 실수했다 싶었는지 메론빙수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을 이었다.


손 닿는 데에 담배하고 라이터는 좀 안 떨어지게 놔줘요. 내가 다른 건 다 끊어도 그건 힘드네.”

처치곤란이 화들짝 놀라며 멜론빙수를 쳐다봤다.

“뭐야! 난 대체 무슨 죄야! 간접흡연으로 내가 먼저 죽겠네!”

“뭐 싫으면 이제라도 흙 탈탈 털고 나가시던가.”

메론빙수는 천연덕스럽게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쳇, 재수가 없으려니, 어디를 가나 짝꿍을 잘 만나야지.”

사라는 처치곤란과 메론빙수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바닥에 흩어진 흙을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저는 서재에 있을게요.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벨 울려주세요.”

사라는 뒷정리를 끝내고 나가려다 창밖에 줄지어 서 있는 목련 나무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진 얼굴을 하고 조용히 서재로 향했다.

처치곤란과 메론빙수는 덩그러니 둘만 남았다. 처치곤란은 창밖에 지나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메론빙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뱉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처치곤란! 내가 사람을 좀 볼 줄 아는데 저 여자 딱 봐도 글쟁이야. 근데 여자 손목 봤어? 줄이 한두 개가 아니야. 쯧쯧, 뭔 사연이 있길래.”

“작가든 화가든 알 게 뭐야, 난 이제 딴 사람 일에는 관심 없어. 죽을 날 받아 놓은 인간이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게. 그냥 빨리 내 할 일 하고 저세상 가는 게 소원이야.”

“죽는 건 쉬운 줄 알아? 그것도 내 맘대로 안 돼.”

메론빙수가 뿜어대는 담배 연기에 처치곤란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

서재로 들어간 사라는 책상 앞에 앉아 한낮에 일어난 일들을 되새기며 노곤한 몸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아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모두 없던 일로 하고 교통비와 수고비를 주고 처치곤란과 메론빙수를 돌려보내면 될 일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출장 중인 애도의 전화였다.

“애도 씨! 어디야?”

“내일까지 여기서 일 마치고 가려고 했는데 근처에 또 예약이 잡혔어. 이삼일 더 걸릴 거 같아. 별일 없지?”

“별일은…, 없어. 몸조심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

“그래, 걱정 마. 나 얼른 나가봐야 해. 나중에 또 통화해.”

전화를 끊고 나서 사라는 고민에 빠졌다. 애도에게 이 상황을 얘기해야 하는지, 과연 애도는 이해해 줄 수 있을지, 다시 잘 지내보자고 다짐하고 관계도 서서히 좋아지고 있었는데…… 이번 주까지 마감인 원고가 밀려 있는데 일이 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먼저 상의를 해야 했는데…, 아냐, 그랬으면 분명 반대했을지도 몰라. 당장 다시 합치는 것도 아닌데…, 미리 일을 저질러 버리면 어쩔 수 없이 지켜보기라도 하지 않을까?’

저녁이 되어서야 사라는 노트북을 열고 원고를 써 내려갔다. 마감날을 맞추려면 시간이 촉박한 탓에 더욱 집중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때 베란다에서 종소리가 울렸고 사라가 뛰어나갔다.

“저기, 나, 벌레는 질색인데 여기 개미들 좀 어떻게 해봐요. 아주 자기네들 집인 줄 알고 오르락내리락 내 다리로 기어 다녀서 미치겠어.”

메론빙수의 투정에 사라는 관리사무소에서 방역하러 왔을 때 주고 간 개미약을 주변에 뿌리고 그녀의 다리에 붙은 개미를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서 잡았다.

“이제 괜찮죠? 약을 뿌려놓았으니 아마 당분간은 개미들에게 시달릴 일은 없을 거예요.”

다시 서재로 돌아온 사라는 쓰던 원고를 마저 쓰려고 의자에 앉았다. 종이 다시 울렸다.

“미안해요, 오늘 축구 경기가 있는데 손**민 등판하는 날이라서요. 텔레비전 좀 크게 틀어주실 수 있으세요?”


처치곤란이 미안한 얼굴로 손바닥을 비비며 엉거주춤 서서 말했다.

사라는 거실 티브이를 크게 틀고 베란다에서 소리가 잘 들리도록 티브이를 최대한 베란다 쪽으로 돌려놓았다. 다시 서재로 돌아간 사라는 타이핑을 하다가 귀로 손을 막았다. 거실에서 들리는 티브이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얼마 후 다시 종이 울렸다.

“물 좀 줘요, 뿌리지만 말고 입으로도 좀 마시게.”

“자꾸 귀찮게 해서 죄송하네요. 통 잠이 안 와서요. 혹시 수면제 같은 거 없나요?”

“심심해 뒈지겠어. 옆에다 라디오라도 좀 틀어놔요. 노래라도 좀 듣게.”

“꼬챙이 같은 것 좀 없나요? 발가락이 간지러워서 미치겠어요. 손을 넣어 긁을 수도 없으니….”

처치곤란은 정중하게 메론빙수는 무례하게 계속 종을 울리고 사라는 몇 번이고 들락날락하면서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종소리는 사라가 잠을 자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울렸고 결국 이른 아침에도 종은 어김없이 울렸다. 사라는 거의 기다시피 느릿느릿 걸어서 베란다로 갔다.

“저 밖에 이삿짐 차, 대체 언제까지 시끄럽게 할 건지 좀 알아봐 줄래요?”

“블라인드 좀 내려줘요. 햇볕 때문에 얼굴에 기미 주근깨 다 올라오겠어.”

“컥컥, 저 담배 연기가 사람 잡네! 미치겠어! 사라 씨, 제발 이 여자 좀 끌어내요!”

“내가 뭐 죄지었어? 끌어내긴 뭘 끌어내? ”

“아휴, 확 그냥, 저걸….”

“때려봐! 때려보라고!”

메론빙수가 팔을 휘젓자 순식간에 처치곤란의 얼굴에 손톱들이 붉은 자국을 남겼다.

"아얏! 에잇 썅! 당장 죽여버릴 테다!"

화가 난 처치곤란이 메론빙수를 향해 손을 쳐들었다.

"쿵!"

참다못한 사라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리고 피곤에 찌든 얼굴을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제발, 이제 식물이면 식물답게 처신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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