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우리

by 나무

땅에 핀 작은 꽃을 볼 때는 무릎 꿇는 게 편해

그걸 꽃무릎이라 부르자







“아빠는 일손을 놓고 술만 드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엄마도 절망 속에서 오랜 세월 힘드셨고……. 아마 지금도 나를 원망하고 있을 거예요. 그때 알았어요. 세상에서 제일 슬픈 집은 웃다가도 서로 눈치를 보는 곳이라는 걸요. 잊히지 않아요. 허공에서 나를 올려보던 귀한이의 눈이…….”


사라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복숭아 향기……, 누나! 하고 나를 부를 때마다 풍기던 복숭아 향기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녀요.”


소리 내어 우는 사라 옆에서 메론빙수와 처치곤란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맘껏 울 수 있는 곳을 이제야 찾았고 그들이 그 울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라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 메론빙수가 사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엾은 우리 사랑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이리 와 사랑아!”


메론빙수가 사라를 품에 안았다. 그녀가 사라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래그래’ 소리를 반복하는 동안 사라는 묘한 안도를 느꼈다.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서 슬프고 괴로워서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소리 내어 우는 건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로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아니 손을 붙들고 있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았다면 귀한이는 죽지 않았을까요?”


사라가 메론빙수의 품에서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그런 소리 마요, 사랑이도 그땐 아이였어요. 사랑이는 온 힘을 다해 동생을 살리려고 했어요. 귀한이가 누나의 얼굴을 보며 세상과 작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건 사랑이가 그 손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처치곤란이 사라의 등에 손을 얹고 차분히 말했다. 메론빙수가 눈짓을 하자 그가 뒤에서 사라를 안았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꽃봉오리 같았다. 세 개의 꽃잎이 서로를 덮은 채 꽁꽁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활짝 잎을 벌릴 준비를 하고 있는…….


빈 잔에 다시 술이 채워졌다. 사라의 얼굴이 한결 편해 보였다.


“여기 있는 게 갑갑하지 않으세요?” 사라가 물었다.


“세상에 나 혼자다 생각하며 살았어. 위로 언니가 넷이야. 다들 학교 선생님, 레스토랑 사장, 높은 공무원……, 다들 삐까번쩍하게 살아, 나만 빼고. 근데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년들이 욕심이 끝이 없어. 마치 승냥이들 같아. 뾰족한 이빨을 내보이고 으르렁대면서 뭐 더 뜯어갈 거 없나 사냥하는 짐승들. 그 년들 잘난 척하고 못되게 구는 게 꼴 보기 싫었어. 엄마는 맨날 잘난 언니들만 편들고……. 그래서 내가 일찍부터 이렇게 까진 거야. 난 여기가 너무 좋아. 사실 이렇게 인간대접을 받은 게 얼마 만인지……. 아니, 식물대접인가?”


메론빙수가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럼 부모님들도 잘 살고 계시겠네.”


호기심을 가득 담은 얼굴로 처치곤란이 말했다.


“똑똑한 딸년들 공부시키느라 빈털터리 된 우리 엄마는 지금도 혼자 고생이지. 우리 집안이 원래 대대로 꼭두 만드는 일을 해왔거든. 아버지가 일찍 죽고 엄마가 청상과부가 돼서 그 일을 대신했어.”


“꼭두가 뭐죠?” 사라가 물었다.


“옛날에는 죽으면 다 상여에 실려갔잖아. 그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인형들이 꼭두야. 평생 나무를 만지느라 엄마 손이 얼마나 못생겼던지, 난 또 그 손이 또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


“그런데 그런 것들이 지금도 팔려?” 처치곤란이 물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상여를 쓰겠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 그런데도 엄마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어디 둘 데가 없어서 집구석에 쌓아 놓는데도 그놈의 꼭두를 자꾸 만들어. 노인네 고집을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사라 씨는 무슨 일을 해요?” 처치곤란이 물었다.


“그냥, 작가예요. 시를 쓰면서 자서전 대필도 하고요.”


“맞지 맞지! 내가 반 점쟁이야.”


메론빙수가 처치곤란을 바라보며 손뼉을 쳤다.

처치곤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도 학창 시절에 문학 소년이었어요. 시도 좋아했고요. 꿈이 있었어요. 큰 정원이 있는 집에서 우리 줄기, 잎새, 열매가 뛰놀고 과실나무도 함께 키우면서 사는 꿈, 그렇게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꿈을 앞당기고 싶어서 주식에 손댔다가 다 잃고 빚까지 지게 되니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사람이 획 도니까 가족도 안 보여요. 맨날 술에 도박까지, 정말 처치곤란한 인생이었죠.”


“처치곤란, 그 이름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었다.” 메론빙수가 눈을 찡긋했다.


“난 마지막으로 긴 글자를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근데 희한하게 입으로 '사랑'을 말하면 그냥 심심한데 왜 글자로 읽으면 눈물이 핑 도는지 모르겠어. 왜 그럴까? 우리 작가님은 알아?”


사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리와 감정이 형태를 입고 실체로 남아서……,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으니 그런 게 아닐까요?”


“소리는 뭐고 형태는 또 뭐야? 당최 뭔 말인지 난 무식해서 모르겠어. 하여튼 난 책은 질색이야. 근데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있던 시 말이야. 그거 그거, 제목이 뭐드라? 님이 갔습니다, 하는 거.”


“님의 침묵?” 처치곤란이 말했다.


“그래, 그 침묵 말이야. 그때 국어쌤이 총각이었는데 인기 짱이었거든. 별명이 핸쌤이었어. 진짜 핸썸했거든. 근데 그 시에 ‘키스’가 있는 거야. 우린 핸쌤과 그 ‘키스’라는 말을 함께 읽는다는 걸 상상만 해도 거의 까무러칠 판이었어. 거기다가 그냥 키스가 아니고 날카로운 키스! 드디어 그날이 온 거야. 핸쌤이 교탁에서 출석부를 보고는 번호를 부르더니 그 시를 낭독하라고 시키는 거야. 우리 전부 숨을 죽이고 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어. 근데 그 애가 우리 반에서 제일 조용하고 소심한 애였거든. 걔가 일어서서 책을 들고 낭독을 시작했어.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놈의 ‘날카로운 키스’로 점점 가까워지는데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가더니 바들바들 떨면서 급기야 거의 울상이 되는 거야. 결국 그 ‘날카로운 키스’ 앞에서 멈췄어. 모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조바심을 내면서 기다리다가 그 애가 목메는 소리로 ‘날카로운 키스’를 읽는 순간 모두 웃음이 터져서 다들 발을 구르고 배를 잡고 난리가 났잖아.


메론빙수의 너스레에 사라는 눈에 남아있던 눈물을 머금은 채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애도였다.


토요일 연재
이전 16화16화. 나와 귀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