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클라 바다르체프스카-소녀의 기도
며칠 전 초등학생 아들의 참관 수업에 간 적이 있다. 학교에서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폴란드 작곡가 테클라 바다르체프스카가 쓴 '소녀의 기도'였다. 마치 타임슬립을 경험하는 듯 이 종소리가 나를 초등학생 시절로 되돌려놨다. 이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니 30년 전에 졸업한 초등학교 운동장을 거니는 듯하다. 아,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내가 수업을 들었던 교실, 친구들과 씨름을 하던 놀이터가 떠올랐다. 나무 아래서 고무줄놀이를 하던 여학생들의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장난도 즐겼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그런 짓궂은 장난이야말로 개구쟁이들이 찾던 재미였다.
무엇보다 내 인생의 첫 피아노 레슨을 빼놓을 수 없다.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음악 시간에 처음으로 ‘이런 게 클래식 음악이다’라며 들려준 곡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였다. 입으로 튜브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건반을 눌렀던 멜로디언을 들고 다니던 기억도 아련하다.
음악 시험은 이 멜로디언으로 오른쪽 손가락 5개를 움직여 '나비야'를 치는 것이었다. 그렇다. '솔미미 파레레 도레미파솔솔솔'의 그 나비야였다. 초간단한 곡이었지만, 나에게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에 버금갈 정도였다. 이 난해한 곡을 신들릴 듯 연주하던 같은 반 여자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나비야를 칠 수 없었던 이유야 명확했다. 악보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콩나물이 빨랫줄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악보는 고대 쐐기문처럼 판독 불가한 정보였다. 이렇다 보니 음악 필기시험도 늘 나를 괴롭혔다. 특히 곡의 한 마디를 통째로 비워 두고, 그 빈칸에 들어갈 음표를 맞히라는 문제는 마치 수능의 ‘킬러 문항’처럼 느껴졌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음악 이론이라도 배우라며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셨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이들이 학교에서 뒤처지면 사교육의 힘에 기대려는 심리가 여전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 시장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셈이다.
피아노 학원은 학교 정문을 나와서 문방구와 떡볶이 가게를 지나 5분쯤 걸으면 닿는 곳이었다. 쥐포 튀기는 냄새를 맡으며 학원 입구로 들어설 때부터 명랑한 피아노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2층 문을 열고 들어서면 피아노가 놓인 레슨실이 눈에 들어온다. 피아노 위에는 소묘로 그려진 모차르트나 베토벤, 리스트, 쇼팽의 초상화가 놓여있었다. 그들은 학원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마치 "애송이 하나 또 왔군"하고 중얼거리는 듯했다.
레슨실과 함께 거실 같은 공간도 있었다. 나는 그곳 책상에 앉아 선생님과 함께 음악 이론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온쉼표와 2분 쉼표 구분법을 배웠다.
"이거 봐라. 이 쉼표는 모자처럼 생겼제. 모자. 그래서 글자 수만큼 2박자만 쉬면 된다. 그런데 옆에 요거는 세숫대야처럼 안 생겼나? 세숫대야. 그래서 4박자만 쉬는 거다."
곧 레슨에 돌입했다. 첫 시작 교재는 역시 '바이엘'이었다. 당시 내가 가진 바이엘은 상하 두 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론을 습득한 뒤 피아노 연주를 배우는 게 큰 도움이 됐다. 내 눈으로 본 음표를 인지하고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게 무척 경이로웠다.
진도에도 불이 붙었다. 한 달 만에 바이엘 상권을 끝내버린 것이다. 선생님은 한 달에 책 한 권 떼기가 쉽지 않다며 나의 발전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쩌면 선생님은 학원에 오랫동안 붙잡아 둘 요량으로 나를 음악 신동인 양 추켜세운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피아노 배우기에 퍽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벽을 건반 삼아 손가락으로 쉴 새 없이 벽을 두드렸다고 한다.
의기양양하게 바이엘 하권에 돌입한 나에게도 첫 시련이 다가왔다. 쓰라린 좌절감을 안겨준 곡은 작곡가 권길상 선생의 '어린이 왈츠'였다. 이 곡은 파에 샵(#) 하나가 붙은 사장조였기에 파 부분에서 검은건반을 쳐야 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았다. 늘 이 부분에서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꼭 파를 쳐야 할 때만 되면 긴장한 나머지 왼손 반주마저 꼬이기 시작했다. 같은 바이엘인데 상과 하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베토벤이 청각을 잃어버렸을 때처럼 어린이 왈츠가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을 때였다. 옆 레슨실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곡이 들렸다. 내 친구 준성이가 치던 소녀의 기도였다.
준성이는 우리 집 근처에 살았다. 보습학원에도 같이 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같은 반은 아니어도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얀 피부에 준수하게 생겼던 준성이는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공부도 그럭저럭 했고, 야구광이기도 했다. 나는 준성이가 던진 강속구를 단 한 번도 받아치지 못했다.
준성이는 아파트에 살고 있어 조금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파트에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다세대 주택에 살던 나로서는 아파트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피아노 학원에 처음 등록했을 때 녀석을 그곳에서 만나 적잖게 놀랐다.
'이 녀석 피아노까지 치는구나.'
그는 음표조차 몰랐던 나와는 달리 이미 고난도의 '체르니' 교재로 레슨을 받고 있었다. 도대체 이 친구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한편으로 질투심도 불쑥 솟구쳤다.
하루는 여전히 어린이 왈츠와 씨름하다 준성이가 연습 중이던 레슨실로 건너갔다. 녀석의 소녀의 기도 연주를 지켜보기로 했다. 준성이의 손은 얼굴만큼이나 희고 부드러웠다. 길쭉한 손가락 마디는 마치 피아노 건반을 쓰다듬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연주가 시작됐다. 스타카토처럼 또렷한 앞꾸밈음은 곡의 도입부를 매우 경쾌하게 장식했다. 곡이 본격적으로 펼쳐지자 준성이의 두 손은 건반 위를 넓게 오가며 춤을 췄다. 나는 감탄하며 그 광경을 바라봤던 것 같다.
준성이의 왼손과 오른손이 흰건반과 검은건반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광경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이 곡은 플랫(b)이 세 개나 붙어 있어서 시, 미, 라에서 반음 내려쳐야 한다. 그는 손가락을 길게 뻗어 좌우는 물론 위아래로도 자연스럽게 건반을 어루만졌다. 반음 하나 제대로 치지 못해 진땀을 흘리던 나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그 순간 나는 모차르트라는 넘사벽을 마주한 살리에르였던 것이다.
나는 끝내 어린이 왈츠를 완전히 익히지 못한 채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가르치는 선생님도, 배우는 나도 지쳐버린 탓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수확은 있었다. 그날 준성이의 소녀의 기도 연주에 큰 자극을 받았다. 체르니 정도만 치면 저런 명곡도 아무렇지 않게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꼭 체르니로 넘어가겠다는 다짐에 불이 붙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어느 정도 음악 이론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학원을 그만두게 하셨다. 없는 살림에 음악까지 배우게 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이 사실을 선생님께 전하자 무척 아쉬워하셨다. 어린이 왈츠에서 내가 음악 신동이 아니라는 게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마치 인류가 한 명의 위대한 음악가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결국 내 인생의 피아노 학습도 바이엘 하권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배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꼭 어디까지 쳤냐고 묻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바하까지 쳤어요."
"아! 바흐요? 대단하십니다."
"바이엘 하권요. 하하."
그러면 대화는 어김없이 정적에 잠긴다.
지금 피아노 학원이 있던 자리에는 옛 건물이 사라지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 그래도 가끔 그곳을 지날 때면 소녀의 기도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내 어설픈 재능을 칭찬하셨던 고마운 선생님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계실까.
그리고 준성이. 그는 지금도 가끔 소녀의 기도를 연주할까? 그 녀석이라면 분명 거실 한편에 피아노를 뒀을 것이다. 여전히 그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건반 위에 펼치고 있을 것만 같다.
https://youtu.be/ReC2W-nhrbI?si=prpgnvw3BmdtKso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