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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장세개 Sep 25. 2021

다시, 피아노


평온한 가을 아침이다. 어젯밤 공중에 떠 있던 달은 사라졌다. 간밤에는 잠을 잘 잤다. 오늘 아침 사춘기 두 아들과 다투지 않고, 함께 청소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서 평화로운 아침식사를 마쳤다. 두 아이는 공부한다며 방에 들어가 있다. 달달한 마그마 커피 한잔을 하며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내가 보는 풍경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나무는 잎이 무성하다. 햇빛이 그 나무를 축복하고 있듯이 감싼다. 햇빛이 투과하는 나뭇잎은 아주 밝은 연두색이다. 나뭇잎은 투명하고 환한 빛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내 시선은 다시 거실 안 피아노로 옮겼다. 그 피아노 위에 동요집 피아노 악보를 펴고, 잠시 피아노를 친다.     



엄마가 되기 전에 회사 다니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피아노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1시간의 점심시간 중 20분 만에 점심을 먹고 회사 옆 건물의 피아노 학원에서 30분을 배우고, 왕복 오가는 시간 10분을 합하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동요집 1권부터 3권까지 배우고, 중간에 ‘Happy birthday'도 연주해서 남편 생일날 동영상으로 보내줬다. 남편이 이런 소소한 자료를 잘 모아두는 편인데 이 영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다음엔 남편이 좋아하는 ’ 캐논‘을 연주해줘야지 마음먹었는데, 회사가 이사하면서 피아노 학원은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 큰 아이가 태어나서 유아교육 박람회에 간 적이 있었다. 피아노가 상품으로 걸린 경품에 응모했었다. 결과는 당첨이었다. 헐~ 이런 게 되다니? 내 인생에 최고의 상품이었고, 행운이었다. 회사가 이사하면서 근처 피아노 학원이 없어 그만두었던 피아노 학원을 다시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그러다 둘째가 태어나며 몸이 많이 불편해져서 피아노 레슨을 중단했다.     

          

바쁘게 일하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다닌 피아노 학원이 너무 좋았었다. 30분의 몰입. 내가 두드리는 건반과 그 건반 소리, 그리고 다시 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연습. 88개의 건반의 조합으로 나는 소리는 너무 아름답고, 미지의 우주이며, 수학의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돼서 배우는 피아노 레슨은 참 재미있다. 무엇보다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나를 더 멋지게 변신시켜주는 것 같았다. 또한 피아노 선율에 집중하며 감성 충만하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피아노 숙제도 없고, 누구와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오롯이 나를 위해 연주하는 것이다. 같은 곡을 치더라도, 손목과 손가락의 강약에 따라서 같은 음도 여러 방식으로 전달된다.     

          

어떤 곡은 중세의 귀족 부인이 되는 것 같고, 어떤 곡은 7살 아이로 돌아가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또, 어떤 곡은 왼손의 저음과 오른손의 고음이 마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그동안 잊고 지냈다니! 정말 억울할 뻔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 배우기를 권했지만 두 아이들은 피아노에 관심이 없었다. 거기다가 선물 받은 피아노는 오랜 시간이 지나 4개의 건반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당첨된 피아노는 1년 정도 사용하고 이후 15년 정도는 악기가 아닌 가구의 역할로 집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가끔 그 위에서 숙제도 하고, 그 위에 짐을 쌓아두기도 하고, 가끔은 화이트보드를 올려놓고 아이들이 배운 공부를 엄마에게 설명할 때 사용했다. 이 마저도 필요가 없어져 버리려고 했다. 남편이 버리지 말자고 한다. 또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며칠 전 와이파이가 고장이 나서 새로 세팅하려고 보니, 피아노 뒤에 전원선이 꼽혀있었다. 와이파이 전원 선을 고치며, 오랜만에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았다. 먼지가 참 많이 쌓여있다. 먼지를 닦아내고, 다시 두드려보니 소리가 잘 난다. 여전히 주요 위치 4개의 건반은 소리가 안 나지만.     

          

오랜만에 피아노 책자를 꺼내서 좋아하던 ‘미뉴에트’, ‘사랑의 기쁨’, 그리고 동요 몇 곡을 쳤다. 너무 좋았다. 아이들 키우고, 일하고, 공부한다는 이유로 피아노를 가까이하지 못했는데, 이젠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실감했다. 공부는 마쳤고, 사춘기 아이들은 자신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일은 스트레스받지 않을 정도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매일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건 아니어서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피아노 레슨을 신청했다. 사춘기 아들과 함께 피아노 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했지만 인기가 많은지 자리가 1자리뿐. 그래서 엄마가 먼저 신청하고, 둘째 아이는 이다음 달부터 배우기로 했다.     

          

피아노 덕분에 아이와 덜 싸우고, 스트레스도 덜 쌓인다. 생각이 잘 안 풀려도 피아노 앞으로! 아이들과 다투거나 감정이 불편하면 피아노 앞으로! 아이들이 모두 외출한 시간에도 혼자 피아노를 친다.     

          



이 글을 쓰면서 나와 같은 사람이 있는지 검색해보았다. 『다시, 피아노』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이자 《가디언》의 편집 국장인 앨런 러스브리저는 일을 하면서 우연히 쇼팽의 「발라드」를 만나게 되어 학창 시절에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찰스 쿡의 『재미 삼아 피아노 치기』를 읽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가 인용한 글은 크게 와닿았다고 한다. 피아노를 늦게 시작했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아마추어이기에 피아노를 좋아하는 대로 즐길 수 있다는 말. 피아노를 즐기고 싶은 사람으로서 정말 마음이 가벼워지는 말이었다. 윗글 뒤에는 “쿡은 그렇지만 ‘하루 한 시간 연습’만큼은 반드시 지키라고 강조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루 한 시간 연습하는 것의 중요성. 역시 아마추어라고 해도 꾸준한 연습은 필수인 법이라고 한다.     

          

오래전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내 안에 있는 근심의 부피가 그리 크지 않아 견딜 만하고, 이런 나는 낙관적이 되어 세상은 대체로 살 만하다고 느낀다. 지금은...... 이것만으로 행복하다고 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피아노』책을 읽고, 피아노 연습을 하고 글을 쓰면서 매일 보내는 내 일상을 저자처럼 정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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