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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Aug 26. 2020

음악으로 기부를 한다고?

음악

산책을 하면서 비지스(BEEGEES)의 음악을 자주 듣는다. 신나는 디스코와 감미로운 팝으로 양분되어 있는 이들의 음악은 가벼운 몸풀기에 딱 좋은 템포를 지니고 있다.

전날 좀 많이 먹었다 싶은 날엔 하드한 메탈을 듣기도 한다. 기름진 몸으로부터 육수를 한 바가지 쏟아내려면 빠른 템포의 메탈이 제격인데, 문제는 과격한 음악을 들으면 예전과 달리 귀가 쉽게 피로해진다는 것. 주인 잘못 만나 일평생 혹사를 당해온 달팽이관의 기력이 쇠한 게 틀림없다.

그런 이유로 결국은 비지스의 음악으로 회귀한다. 달팽이관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비지스의 음악을 귓가에 흘려보내준다. 미디엄 템포에 맞춰 사뿐히 걷다 보면 어느새 촉촉한 땀이 슬며시 배어 나와 산뜻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비지스를 알게 된 건 주유소 알바를 했던 고등학교 시절이다. 나른한 오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라디오 디제이가 '우리나라에선 Holiday와 How Deep Is Your Love 란 곡으로 유명한 전 세계적인 그룹이죠' 라며 비지스를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는 몇 곡을 틀어줬는데 마지막 곡이 <Too Much Heaven>이었다.


혹시 그런 기분 아는지... 가사도 알아먹지 못하는 난생처음 듣는 음악에 마음이 멜랑꼴리 해지는가 싶더니 묘한 애잔함과 동시에 행복했던 추억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찰나, 경이로운 환희에 도취되어 미세한 전율로 인해 온 몸의 닭살이 돋아 결국엔 어깨를 부르르 떨고 마는 그 기분.

메마른 지상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천국의 선율이라고나 할까. 그날따라 휘발유의 냄새가 달짝지근했던 기억이 난다.


어젯밤에 폭식을 해버린 탓에 아침부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책에 나섰다. 메탈이나 하드록을 들을까 하다가 비지스의 음악으로 가득 채워버렸다. 가볍게 걸으며 뻐근한 몸의 관절을 하나둘 맞춰 갈 때쯤, 어디선가 휘발유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공원 재정비 공사로 어디선가 발전기를 돌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투머치 해븐'의 첫음절이 고막을 울리며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혹시 그런 기분 아는지... 태양이 지상 위의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만 같은 한여름, 에어컨이 빵빵한 어느 맥주 공장의 시음홀에서 갓 생산된 신선한 맥주를 단숨에 쭈욱 들이키며 '허허, 이거 목 구녕부터 발끝까지 얼어버릴 것 같군' 이란 생각이 들어서려는 찰나, 궁극적 상쾌함이 절정에 달해 머리카락들이 쭈뼛 서는 야릇한 흥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다 못해 결국엔 어깨를 부르르 떨고 마는 그 기분.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은 것만 같은 희열이었다고나 할까. 주유소에서 비지스의 음악을 듣고 오줌을 지릴 뻔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하여튼 기분이 들떠서 <투머치 해븐>의 가사를 해석해보기도 하고, 곡의 정보도 파헤치며 산책을 이어나가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곡은 1979년, 유니세프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이 곡을 통해 얻는 모든 수익 또한 유니세프에게 기부되도록 했던 것이다. 비지스 공식 SNS에 따르면 2017년까지 그 액수가 무려 11 밀리언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원화로 환산하면 100억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멜로디에, 가사에, 뜻깊은 의미까지...


고등학생 때부터 이런 훌륭한 곡을 직감적으로 알아본 나의 미적 감각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곡 하나에 100억이라... 나는 언제쯤 저런 돈을 만저나볼까 생각하니 문득 2년 전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나 했던 미몽이 또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만약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어느새 과대망상의 지면 위를 걷고 있는 나에게 먼 곳으로부터 질문이 날아든다.

"작가님! 그 엄청난 액수의 인세를 어떻게 쓰실 예정이신가요?"


나는 근엄한 얼굴을 하고선 그에 응답한다.

"저에게 돈이란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합니다.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져 내리고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지금과 같은 시대에선 인간이란 자고로..."


"그렇다는 말씀은 모든 인세를 기부하시겠다는 건가요?"


"이 사람이! 꼭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저는 작은 일에도 신중을 가하는 성격인지라..."


"전작에서도 기부에 관한 이야기를 쓰셨는데 그럼 기부는 언제쯤 하실 예정인가요?"


"허허, 기부는 남모르게 해야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묻지 마십시오"


"그런 방식으로 작가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기부단체들을 외면할 생각인가요?"


"이 사람이! 그나저나 혹시 비지스의 투머치 해븐이란 곡을 아시는지, 그 곡의 로열티가 벌써 130억을 넘어섰는데 모든 수익이 기부가 되는 형식이죠. 그래서 떠오른 생각인데... 다음 책은 기부단체에 헌정하는 위대한 책을 한 권 써볼까 합니다.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130억 쯤은 훌쩍 넘어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하하하"


유토피아적 상상에 빠져 큭큭큭 웃어대며 걷다가 다리가 엇갈려 자빠질 뻔했다. 다행히도 현실감각을 되찾아 다시금 운동에 집중할 때 쯤, 냉정한 현실의 목소리가 귓구멍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작가님, 현재 자비출판으로 적자만 700만 원이라죠, 만약 이번 책마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면 작가님은 1000만 원의 빚을 보게 되는 셈인가요? 책이 세상을 빛을 보게 되는 동시에 작가는 빚을 지게 된다니, 거참 아이러니한 일이네요. 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현실은 무섭도록 슬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저려오고, 커피잔을 들려는 왼쪽 손모가지가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리는 건 기분 탓일 게다. 안구의 습기가 가득 차올라 뿌연 모니터의 화면이 차츰 흐릿해지면서 형태를 잃어가는 듯한 느낌 또한 기분 탓일 게다. 세수 좀 하고 와야겠다(농담). 그동안 비지스의 음악을 한 번쯤은 감상해보시길.


무난한 곡으로 Love So Right 추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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