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기괴한 꿈을 꾸었다. 무섭진 않아도 잔상이 오래 남는 꿈. 날씨도 덥고 해서 그 내용을 지금 살짝 적어보려 하니, 심신이 약한 사람은 심호흡 한번 깊게 들어마시고 읽기를 권한다.
꿈속에서 나는 깊숙한 지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정면으로 손잡이를 잡고 일렬로 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의 뒤통수가 줄지어 보였고 왼쪽엔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른쪽의 아찔한 공간만을 생생히 기억한다. 대략 10미터쯤 되는 낭떠러지였는데 고개를 내밀고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으려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세 칸쯤 앞에서 누군가 폴짝 뛰어올랐다. 양손으로 오른쪽 손잡이를 잡아 걸터앉고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뒤뚱거렸다.
'장난치고는 너무 위험한데' 하고 그를 보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놈은 웃고 있었다. '야, 위험하잖아, 내려와' 하고 입을 떼려는 일순 그가 중심을 잃더니 뒤로 넘어가 버렸다. 쿵 소리가 났다. 이게 뭔 일일까. 어안이 벙벙했다.
한데 한편으로는 상당히 침착했다. 흥분하지도 않았고 걱정되지도 않았다. 단지 생사가 궁금할 뿐이었다. 나는 지상에 안전하게 발을 딛고 나서야 바닥으로 추락한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뭉개진 두개골 사이로 뇌가 덩그러니 노출되어 있었고, 뇌척수액으로 보이는 액체가 바닥을 흥건히 적셔 놓았다. 놀라운 일은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읔 하고 눈살을 한번 찌푸리고는 '저기서 떨어진다고 뇌가 튀어나오다니... 거 참 희한하네' 하는 의구심만 들었다.
이후, 몇 개의 머리가 더 터졌고 몇 개의 뇌가 나의 시선을 끌었는데 나는 담담했다. 가던 길을 계속 걸어 나갔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사이코패스 같기도 하지만 그런 광경들을 보면서도 왜 감정의 동요가 없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꿈에서 깨자마자 인터넷을 찾아봤지만 딱 들어맞는 해몽은 없었다. 피를 보는 건 좋은 일이라고 했으나 피는 없었고 뇌척수액만 있었으니... 한마디로 개꿈이었다.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마음 같아선 좋은 꿈만 골라 꾸고 싶지만 꿈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내 뜻대로만 되진 않는다. 나의 꿈을 크게 세 갈래로 보자면 좋은 꿈, 무서운 꿈, 개꿈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좋은 꿈이란 예쁜 여자가 등장하는 꿈이다. 보통 꿈에는 아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공교롭게도 아는 사람 중에 예쁜 여자가 전무하다. 이런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내 꿈의 주 고객은 연예인들이다. 그녀들은 보통 나를 사랑하는 설정으로 등장한다(고생들이 많으십니다). 가끔은 동시에 두 명에게 고백을 받아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한다(이럴 땐 참 곤란하지요, 헤헤). 이런 꿈은 일언의 설명도 필요 없이 좋은 꿈으로 분류한다.
무서운 꿈이란 귀신 혹은 알 수 없는 공포의 존재가 나를 압박하는 꿈이다. 어렸을 적 자주 꿨던 꿈인데 요새는 뜸하다. 대신 가위에 자주 눌린다. 가위와 꿈이 뒤섞여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탓에 매번 양팔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다 신음하면서 깨어난다. 이런 꿈은 당연히 무서운 꿈이다.
무서운 꿈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백수가 된 이후로 신기하게도 가위에 잘 눌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가위는 정신적인 문제보단 육체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백수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그 증거로 40년가량을 쉬지 않고 일해 온 아빠는 지금도 자주 가위에 눌리곤 한다. 누우면 무조건 1분 안에 잠드는 게 아빠의 특징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으허허" 하면서 깨어나는 것도 아빠의 특징이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면 안 되지만 매번 보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으허허" 소리를 내며 아빠가 깨어날 때면 TV를 보고 있던 나는 배꼽을 잡고 큭큭거리며 묻는다.
"왜, 왜, 또 귀신 나왔어?"
"몰라... 귀를 확 잡아 댕기더니 시끄럽게 아주 막 중얼중얼"
다시 잠자리에 들지만 곧 또다시 "으허허"하며 깨어난다.
"왜, 왜, 이번엔 또 뭐야?"
"여기 틈! 베개 틈에서 땅벌들이 기어 나와가지고는 아주 막 웽웽거리고"
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자신을 깨우지 않았다고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아이 같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 입가에 말 그대로 아빠미소가 새겨진다. 아빠를 보며 아빠미소를 짓는 아들이 되다니. 세월이 꿈결같다.
모두가 좋은 꿈만 꾸었으면 좋겠다. 현실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좋은 꿈들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꿈에 나오길 바란다. 여자 친구가 없으니 내 꿈엔 로또번호가 나오길 바라고, 아내가 있으니 아빠의 꿈에는 사랑하는 엄마가 나오길 바란다.
엄마가 나온다면 아빠는 "으허허" 소리치며 깨어나
"네 엄마가 나와서 아주 막 잔소리를 중얼중얼"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고 오늘 꿈자리가 뒤숭숭한 분들이 있을까 걱정이다. 그런 분들을 위해 포근한 자장가를 한곡 띄워드릴까 한다.
그랬구나, 무서운 꿈을 꾸었구나.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 마, 걱정 마, 걱정 마.
진심으로 내가 너를 지켜줄게.
초난강(쿠사나기 츠요시) - 정말 사랑해요 중에서.
초난강 형님의 컴백을 18년째 기다리고 있는 오타쿠는 꿈자리가 사나울 때마다 이 노래를 떠올리곤 한다. 확실히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