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꼭지의 글을 쓸 땐 나와 같은 경우는 서론, 본론, 결론에 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꾸만 ‘감동적인 요소’들을 글 안에 심으려고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자연스러운 감동을 이끌어 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잘 알면서 왜 계속 그러는 건지, 참.
모르긴 몰라도 서론부터 독자를 확 끌어당기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분명 내재되어 있을 것이고, 뭔가 멋들어지게 마무리를 짓고 싶은 허세도 곁들여 있겠지만, 결국은 어느 부분이든 간에 감동적인 내용들로 가득 채워서 독자들에게 ‘뜻깊은 시간’을 제공할 수 있는 글들을 쓰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꼴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그럴 땐 ‘인용’이라는 것이 꽤나 도움이 된다고 한다. 소위 명언이라 일컬어지는 말들을 인용하면 글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글의 마무리도 깔끔해진다고 한다. 특히 나와 같이 글을 막 쓰기 시작한 사람에겐 필수일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나는 ‘인용’이라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진부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인용 없이 나만의 글로만 채워내고 싶은 오기 같은 것이 발동한다, 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쓰기가 두려운 심정이다. 감동적인 명언을 매개체로 하여금 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야 하는 능력이 부재하는 것은 물론, 인용을 해야 할 타이밍을 포착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끔은 명언 한 줄에 내 어설픈 글 전체가 싸잡아 먹혀 버리는 느낌마저 들곤 한다.
모든 챕터의 글이 감동이나 교훈을 줄 순 없다. 또한 사람들은 각자 느끼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위안삼아 가벼운 글들을 말 그대로 즐기면서 써나가기도 한다. 가벼운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분명히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갖고서. 그러면 글 쓰느라 한동안 지쳤던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치유된다. 하지만 결국은 먼 곳에서부터 의미 있고 감동적인 글을 써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책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글쓰기란 참 만만치 않은 행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는 명언이나 큰 감동이 없다. 마무리 또한 대충 얼버무리는 느낌이 강한데, 이상하게 깔끔하고 매력적이다.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아, 꼭 감동이라는 코드에 구태연하게 얽매이지 않아도 되겠군’ 하며 한시름 놓게 되었다. 그리곤 언젠가 이 이야기를 내 글을 검토해주는 동생에게 하자 그는 골똘히 생각한 후 대답했다.
“형, 그건 무라카미 하루키니까 가능한 거야.”
말인 즉, 하루키의 에세이가 다소 가볍게 느껴질지라도 그만의 특별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업적도 있겠지만 ‘고수는 준비동작만으로도 상대를 긴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그런 종류의 특별함이랄까.
“그럼, 나는 불가능하겠군.”
“형은 당연히 불가능하지, 는 장난이고 형은 더 잘 쓸 수 있어. 형은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부담감 갖지 말고 편하게 써.”
소설들 중에서도 비교적 짧은 단편 소설들은 큰 감동을 느끼기 힘든 경우가 많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우상이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유명한 러시아 국민 시인 ‘푸시킨’의 산문 소설집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다.
비극과 희극이 섞인 짧은 소설들로 이루어진 이 책의 마지막은 ‘가짜 농군 아가씨’라는 소설이었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어느새 마지막 장이라 아쉬움을 감출 수 없던 도중 나는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단편 소설 같은 경우는 간단하고 깔끔하게, 솔직히 말하자면 허무하게 마무리를 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편 소설을 접해 본 독자들이라면 그 특성을 어느 정도 감안을 하고 읽게 된다. 그런데 푸시킨은 그런 단편의 성격을 이해라도 해달라는 듯이 허무하게 끝나는 마무리에 하나의 문장을 덧 붙였다.
‘독자 여러분들은, 대단원을 쓰는 공연한 의무에서 날 해방시켜 줄 것이다.’
이 가볍고도 솔직한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킥킥거리며 웃으면서도 ‘이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이 얘기를 동생에게 해준다면 그는 또 한 번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면서 말하겠지. ‘형, 그건 푸시킨이라서 가능한 거야’라고.
글 속에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매력이 있다. 그 기반 위에서 위대한 작가들은 자신의 글쓰기 솜씨를 맘껏 뽐내며 호흡을 맞춰간다. 내 수준에선 아직까지 그 본연의 매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글로 표현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지만 그 매력은 분명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어찌 됐든 오늘은 가벼움, 그 본연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은 날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매번 무거울 수도, 그렇다고 가벼울 수도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거나, 인생 또한 음과 양의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아름답다거나 하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다.
오늘은 무엇을 쓰든 감동이란 압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기분.
글이 엉망일지언정 잘 써야만 한다는 생각은 내려놓고 되는대로 쓰고 싶은 기분.
마무리도 어영부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