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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로 Jan 27. 2023

명절 집구석, 이번에도 진절머리났다면

가까운 그들 사이에 선, <라인>

크리스마스, 그러나 명절영화


<라인>은 정확히 설연휴가 끝난 다음날에 개봉했다. 일부러 이런건가 싶다. 이 영화의 배경 중 하나는 크리스마스다. 한국에서야 이 날이 상업화의 바람을 타고 커플들의 축제날로 변질된지 오래지만 기독교를 거친 서구문화권에서 크리스마스는 엄연히 '명절'이다. 이때만큼은 오랜동안 못보던 가족들도 한데모여 함께 밥먹으며 선물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광경이 그려진다. 그렇다, 이건 설이나 추석이다. 그렇기에 서구권의 크리스마스를 우리의 감성에 걸맞게 체험하려면 한국의 크리스마스보다는 설/추석에 빗대는게 맞지 않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라인>은 분명히 '명절'영화다. 


그리고, 가족영화


'명절'은 가족이 모인다. 함께 살던 식구가 오랜만에 본가에서 한데 있게 된 자리. 행복하게 웃고 떠들기만 하는 광경이 그려질까? 그건 오랜동안 당연해보이는 가족상처럼 사회적으로 부여되어온 클리셰기도 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이들도 알다시피 가족간의 관계가 마냥 행복하기만 하진 않다. 가족이란 행복함과 안락함만큼이나 고통과 처절함이 새겨질 수도 있다. 마치 인간 삶이 그러한 것처럼.

식구들간의 다툼을 보면 때론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것으로 부딪히는 듯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사랑하며 같이사는 사이여서 역설적으로 가능한, 근원적인 감정의 충돌이 있다. 지나가며 내뱉은 혼잣말의 말투가 거슬리거나 물건 정리 방식 때문에 일어난 식구들의 불화에는 내 자식은 왜 저럴까부터 엄마 아빠는 대체 왜 이 모양인가, 형/언니는 자꾸 왜, 동생 녀석은 하필 이따구란 말인가 같이 가족이란 타자에 대한 근원적인 넌덜머리남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왜 저런지는 쉽사리 '해결' 될만한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의 문제다. 그게 사라진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해결되어서가 아니다. 대부분 그런 질곡은 원인을 찾아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여 충실히 이행하기로 하는 가시적 협의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뎌지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분가를 통해 '해소'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소되어 평소엔 기억의 저편에 묻어둔 문제가 다시금 불현듯 표면화될 때가 있다. 명절같이 한데 모이는 자리다. 관계 근저의 감정적 얽힘이 다시금 마각을 드러낸다. 그것이 명절때마다 이놈의 집구석이 넌덜머리나게 되는 이유다. 무뎌졌다고 해소되었다고 느껴지던 가족간의 근원적 긴장이 사소한 사건 하나로 다시금 폭발할 수 있다. 그런 경우 명절은 처절해질 수 있다. 기껏 오랜만에 모여서는 언성을 높이며 서로 다투기 시작하는 부모와 형제, 친인척들. 단란함만큼이나 흔한 광경아닌가? 거기엔 부모로부터 차별받던 둘째의 설움과 모든걸 짊어지며 다른 형제들에게 비웃음만 사던 첫째의 불만과 시기와 질투를 받던 막내, 자식들에 대한 기대와 그에 부응하지 못한 죄책감에 어느새 뒤틀려버린 부모/아이의 감정같은게 깔려있을 수도 있다. 부모는 늙고 아이는 이미 다 커버렸어도 그런 뒤틀렸던 감정은 어떻게든 징후를 남기니까.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오래간다.


그런 근원적 감정의 풍파는 그런 충돌의 행간에 묻어나온다. 많은 경우 '해결'될 수 없는 형태로. <라인>은 그런면에서 식구 사이 감정의 교차를 제대로 보여준다. 여기서의 식구들은 엄마와 세 자매이고 여느 가족관계가 그러하듯 그들은 진지하고도 처절하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은 서로를 더없이 사랑하니까. 그들의 신체에 새겨진 피흘리는 상처는 그대로 그들 마음의 반영일테지만 그 모든 건 서로를 사랑하기에 가능한 상처다.


치유의 방식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본가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다수겠지만 더러 지난 지긋지긋한 기억이 반추될까 일부러 그러지 않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되풀이되는 다툼에도 불구하고 본가를 찾는 사람도 있을테고. 어느쪽이든 거기엔 가족과의 후벼파는 감정적 얽힘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이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식구간의 질곡을 겪었던, 혹은 지금도 겪고 있을지도 모를 이들에 대하여 위로와 치유를 줄 수 있는 영화다. 그렇지만 그 방식이 신파는 아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가능하다 보는건 지나치게 오만한 태도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 어떤 것들은 인내하고 때론 감내하고 그저 세월에 따른 무뎌짐을 기대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극적인 스펙타클과 함께 부모자식관계가 한큐에 해결되는듯 보여주는 모 방송물은 관계의 본질을 결코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스펙타클과 극적 해결은 시청자가 기대하는 플롯 구조에는 부응할 수 있어도 관계에 있어 숨은 감정의 많은 응어리를 묻어놓고 생략해야만 가능한 연출이다. 가족간의 문제가 얼마나 극적으로 단기간에 방송스케줄에 맞게 효율적으로 해결이 가능할까. 존재라는게 그리 쉽게 변할까. 연출진에 의해 극적으로 양념질된 사례가 아니라 실제로 비슷한 문제에 몸서리쳐 본 사람이라면 그런 극적 해결의 판타지를 조소할지도 모르겠다.


위로와 치유에는 그저 자기가 처해있던 상황을 바라봐보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격렬한 다툼 중에서는 보이지 않던게 잠시만 멀찍이서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보이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메타인지라 해야할까. 이런 태도가 누군가 처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다만 그걸 관조하게 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이 영화의 주된 갈등은 모녀이지만 이건 가족관계 어딜갖다 끌어놔도 말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가족과의 진절머리를 겪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자기자신의 어떤 지점을 분명히 관조하게 만든다. 자기자신과 비슷한걸 겪는듯한 누군가를 보면 당연히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라인>의 어느 등장인물은 실상 나의 모습일수도 있으리니.


<라인>에 등장하는 모녀가 겪는 관계의 질곡에 대해서 영화는 쉬이 그 전모를 대놓고 친절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고통과 회한의 깊이는 그렇기에 더욱 증폭된다. 실제로 우리의 질곡도 그러하니까. 대놓고는 아니지만 영화의 행간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그런 질곡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자기자신이 겪었던 식구와의 감정적 얽힘도 읽어낼 수 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건 치유에 분명히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다. 


명절 집구석에서 다시금 진절머리남을 느꼈던 이들에게 위로가 전해지길. 나는 영화 <라인>이 너무 억지스럽지 않게 담담한 길을 통해서지만 거기에 분명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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