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은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적이 없다. 항상 스스로의 욕망이 아니라 주변의 질서가 그들을 규정했다. 탄생부터가 영국과 청나라 간의 아편전쟁의 산물이었다. 이후 짧았던 일본의 점령도, 그리고 다시 영국의 통치가 돌아오는 과정도 모두 중일전쟁/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국제질서의 재편 속에서 이루어진 일일뿐이었다. 영국의 통치도 딱히 민주적이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어디까지나 정책은 영국이 임명한 총독에 의해 이루어졌고 홍콩의 민의에 의한다는 원칙은 영국의 통치원리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민의가 반영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정세와 지배세력의 역학관계 사이에서 허여됐다. 67폭동과 이후의 영-중 간의 체제경쟁으로 인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에 대한 개혁 조치가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특정시기까진 영국인과 홍콩인 간의 차별이 공공연하기도 했다. 홍콩인에게 정치질서란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홍콩반환도 홍콩인들의 욕망과는 철저히 유리된 외적인 국제‘질서’에 의해 결정되었듯이.
<화양연화>는 사회적 질서와 개인의 욕망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서 질서란 ‘결혼’이겠지만 단순히 부부 둘의 합의에 의해 창출된 관계라는 의미보다는 사회의 지배적 제도, 질서로서의 결혼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모운(양조위)과 려진(장만옥)의 관계가 맞바람이기에 괜찮다하든, 어떤식으로 포장하든간에 둘은 어디까지나 불륜이고,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문제되는 상황으로 등장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질서’ 하에서 둘의 로맨스라는 ‘욕망’의 줄타기, 그리고 사회적 에토스와 개인적 낭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이룬다. 매끈하도록 잘 뽑아져나온 너무나도 매혹적인 미장센에는 그게 녹아 있다.
모운과 려진은 자기 배우자와 같은 타이와 가방의 출처를 물으며 안좋은 예감이 현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드러난 배우자의 배신에 대해 려진은 그 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 궁금해한다.
이건 배우자의 불륜의 시작에 대한 물음이지만 동시에 둘의 관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이다.
그에 대해 답을 찾으려 둘은 처음으로 역할극을 한다.
둘은 남녀 중 누가 먼저 불륜에 주도적으로 나섰을지 각각의 경우에 대해서 각자의 상대배우자를 연기해본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알 수 없이 발생한 나쁜 일에 대해서 그걸 모르겠다는 식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설명을 시도해본다. 이미 일어난 사태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일정한 설명을 부여해야 이미 일어난 일을 그나마 인정하는 것이 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면 상상으로라도 그 빈틈을 메꾸려 해보기도 한다.
그때 활용되는 방식 중의 하나가 역할극 아니겠는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남편이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다. 남편의 잦은 출장에 여러 번민과 불만에도 충실하려 한 자신을 배신한 이 불합리함에 대해서 설명을 달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 역할극이었다. 결혼관계가 무너진 이 일의 추이를 상상으로라도 알아보고 싶어하는게 려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첫 역할극의 말미에서 ‘둘 중 누가 먼저 나섰는지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모운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결국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지 모운은 다르게 반응한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고, 누가 주도했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운은 이미 일어난 일을 캐기보다 다만 이제 어떤 식으로 그 사태를 대할지에 방점을 두는듯하다.
이런 첫번째의 역할극은 아이러니하게도 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모운과 려진은 모두 기존 결혼 과정에서 어떠한 번민을 느꼈든, 부부간에 어떤 갈등이 있었든간에 일단 거기에 대해서 충실하려 했었다. 아내가 이상하게 매일 늦더라도 함께 갈 여행을 계획하거나, 남편의 잦은 출장에도 충실히 아내로서 집을 지키고자 하거나. 그들은 부부간에 느껴지던 소원함에도 먼저 바람을 필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혼이라는 사회질서에 일단 부응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려 애써보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들은 질서에 충실해보려 노력했다. (역할극에서 상대의 배우자 역을 하는 둘의 연기가 어색하지 않은 건 둘은 기존의 결혼에 충실하라는, 사회가 부여한 role에 따라 움직이는 역할연기에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둘은 시작조차도 '우리 만나볼래요?'란 돌직구로 자기 욕망을 정면으로 내보이는것이 아니라 상대 배우자의 역할을 연기하면서 간접적으로만 자기 마음을 내보일 수 있는 인간이다.
거리낄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을 내보이는 모운의 친구 아병이나, 자기의 불륜을 숨기려 비서를 통해 집에 전화로 아내에게 핑계거리를 대는 려진의 직장사장 하 선생과는 정말 다른 두 사람인 것이다. 혹은 캐릭터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식으로서만 욕망을 내보일 수 있는게 그들의 운명인지도.
모운은 결혼을 가끔은 후회한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영화는 마음대로 보고 했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이에 려진은 결혼 전에 훨씬 행복했다면서 혼자일때는 뭐든 마음대로 했지만 둘이 되고서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둘 모두 영화를 마음대로 보곤 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결혼질서에 편입되기 전의 개인. 그렇게 그들은 마음대로 욕망할 수 있었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결혼을 통하여 욕망을 잃어버리고 그저 결혼이라 하는 질서에 편입된 것이다. 개인성을 잃어버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들은 결혼 전에 영화를 좋아하고 무협소설을 즐겼던 꽤 뚜렷한 개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개인성은 무엇보다도 문화예술의 향유로 느끼고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질서가 그들을 배신했을 때 그들은 스스로가 망각했던 그 개인성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리고 그 개인성은 마찬가지로 무협소설과 영화라는 문화예술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사회가 약속한 결혼질서의 이상은 깨어져 버렸고, 더 이상 결혼에 충실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배우자의 배신에 번민하며 결혼을 통해 잃은 자유에 대해서 토로하는 려진과는 달리, 모운은 일단 그 상황하에서 일단 자신이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다.
모운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 사람인지가 드러나는게 무협소설을 다시 쓰려는 시도다.
그리고 그 여정에 려진도 동행하길 제안한다. 일단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니까. 그런 상황하에서 글을 쓰며 려진과 더 가까워질 구실을 만드는 것은 한편으로 그 결혼질서에 이미 편입된 상황하에서 실현할 수 있을 욕망에 충실한 일이기도 하다. 즉, 질서로부터 고통받는 상황에 계속 괴로워하기보다는 그 괴로움을 빗겨낼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찾는 것이다. 결혼 전처럼 무협소설을. 그것은 사회질서에의 편입을 통해 잃어버린 개인성/욕망을 반추해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