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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로 Oct 30. 2022

에필로그: 먼지쌓인 유리창 너머-

홍콩의 화양연화 에필로그

이 글은 브런치북 <홍콩의 화양연화>(https://brunch.co.kr/brunchbook/inthemoodforhk)의 에필로그입니다.


香港的 花樣年華

-에필로그: 먼지쌓인 유리창 너머-



홍콩의 화양연화를 추억하며-

아마 저 말을 하려고 그렇게 글을 썼던거 같습니다.


19년 홍콩시위가 아니었다면 이 글은 쓰여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의 홍콩에 방문했던 나의 운명에 감사합니다.


이 글은 홍콩을 다녀온 19년 겨울때부터 쓰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편은 언젠가 홍콩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세상사람들로부터 홍콩이 온전히 잊혀졌다 싶을 때 내놓으려 했습니다. 지금은 어떠한 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서양의 정치철학사를 관통하는 테마로 박해와 글쓰기를 듭니다. 통념과 관습에 대한 믿음으로 결합된 공동체에서의 정치와 그걸 들춰내고 진리를 찾으려 하는 철학 사이의 근본적 긴장관계는 인간세에서 항상 있어왔다 하죠. 대표적인 예로 드는게 아테네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은 소크라테스죠. 그래서 사회에 속해있는 한 인간일 철학자는 그 안에서 사회를 뒤흔들고 깰수도 있는 진리를 설파하면 그런 사회공동체로부터 받을 박해에 대한 우려를 항상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에 대한 대처방식으로 철학자들은 비의적 글쓰기(esoteric writing)를 해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요 정치철학자의 저작 중엔 겉으로 보기에는 사회에 별 위협이 안되는 A라는 이야기인데 행간을 주의깊게 보면[비의적 독해; esoteric reading] 세상을 뒤흔들수도 있는 X라는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고 말이지요.


이에 대한 얘기를 더하자면 너무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테니, 얼른 영화얘기로 넘어가보자면. 이런 그의 견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박해의 가능성은 어딜가나 존재하는게 인간현실인건 맞을겁니다. 현대의 시대에도 예외가 아닐겁니다. 정치적 논쟁이 극단적 비아냥을 넘어 떼거리 공격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더요. 그리고 공동체의 결합과 계속된 존속에 기반한 근대국가도 예외는 아니겠죠. 터부시가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인간세계에서.

그렇다면 영화에는 이런건 없을까? 했던겁니다. 그때에 눈에 들어온게 왕가위의 영화들이었습니다. 글에서는 주로 <화양연화>를 이야기했지만 <일대종사>도 보면 홍콩의 시작에 대하여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다고 느껴졌지요.(언젠가 할 기회가 있을겁니다.) 그래서 그런 시야로 찬찬히 영화를 훑어봤습니다. 그리고 썼지요. 그러다가 심지어 고등학생 때 보던 <사미인곡>을 다시 보게 될줄은 예상을 못했습니다만.


화양연화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는 텍스트가 되긴 할텐데. 이런 영화는 뭔가 ‘실재(the real)’에 가까운거라 수백, 수천 페이지로 써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나올겁니다. 무한의 텍스트를 낳을 실재에 가까운 사물입니다.

그래도 일단 애초에 생각을 했던걸 다 쓰긴 한거 같습니다.


근데 여기에 굳이 에필로그를 더하는 이유는, 다 쓰고나니 무언가 너무 어둡게 끝났다고 해야할까나 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중에 하나는 너무 과거… 회상, 돌아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서가 아닌가해요. 물론 영화 <화양연화>의 지배적 정서는 어디까지나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그런 과거를 돌아봄이 꼭 회고적인 정체(停滯)이기만 할까요. 과거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인가는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걸 에필로그서 조금이라도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여기서도 옛시절 홍콩 깃발을 흔들고 있었을지언정,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란건 홍콩의 미래 아니었을까요.

저 깃발은 과거이지만 펄럭임이 향하고 싶어하는건 미래입니다.


옛 시절을 잊지 않고 미래를 열려하는 시도도 애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미래를 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저 깃발은 누구에 대해서 흔들고 있는걸까요. 현재 홍콩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것이겠지만, 그들도 과거로 돌아가자는 표어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게 옛 홍콩이 아니라 아편전쟁 이전으로의 중화제국이겠지만요. 똑같은 복고에서 간극이 느껴지는 아이러니. 중국의 복고도 미래지향이 뚜렷이 드러나는 슬로건입니다. 미래 중국은 다시 과거 중화제국의 위상으로 올라서야 한다는거겠죠.

현실적으로 보자면, 아편전쟁 이전 위대한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토인과 반환 이전 홍콩의 낭만을 회상하는 홍콩인은 모두 옛날을 외쳐도 그 간극을 메우긴 대단히 힘들어 보이긴 합니다. 둘은 어느 과거냐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미래에 대한 말을 하는거죠. 이 일의 평화적 합의를 위해선 그 간극을 메꾸는 것부터 이루어져가야 할거로 보입니다.

이 얘길 쉽게 느껴보기 위해선 이렇게 상정해보는게 좋겠습니다. 구한말 어디 남쪽 섬 어디가 프랑스령으로 넘어갔었는데 아직 안 돌아왔고 최근에야 한국에 반환된 상황으로 말이죠. 그리고 구 프랑스령 어느 섬은 프랑스어도 공용어로 사용해왔고 스스로가 한국보다 문화나 문명에서나 더 낫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의 반환을  반기고 있지 않지요. 이 상태에서 둘의 온전한 결합과 공존은 어느쪽이든 양쪽이든 스스로의 관점을 일정히 유보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건 한큐에 말하기 어려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느 과거를 향한 향수냐.

중국이나 홍콩이나 둘다 과거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미래를 향한 이야기입니다.


왕가위의 가장 최근작 <일대종사>에서도 궁이(장쯔이)가 혼사를 물려서라도 마삼과 싸워 되찾으려는, 남권과 북권을 아울러 중국무술을 통합하려 한 아버지 궁우전의 필살의 수, 노원괘인의 정수는 그저 ‘돌아보는 것’이죠. 괜히 그런게 아닐겁니다.


뜻밖에 <화양연화>에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싱가폴에 있다가 다시 방문한 1966년 홍콩에서 주모운은 안부차 방문한 옛 집에서 소려진이 거주했던 건너 방에 지금 살고있다는 애딸린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고서 66년 홍콩 시퀀스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장면,

둘의 아이일까요?

저 아이는 누구의 아이일까요. 둘이 만나던 때를 고려해보면 시간상으론 힘들지도 모르다는건 알지만 묘하게 상상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63년 싱가폴에 왔었던 려진의 방문은 설마? 아이가 있다고 말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다른 해석도 가능하겠다 싶고요. 저 아이가 둘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솔직했을 때의 산물은 아닐까.

둘의 로맨스가 남긴거라면 저 아이가 홍콩의 ‘미래’는 아닐까 말이죠.

시리즈에서도 누차 이야기한 것이지만 여러 대사들은 영화배경인 1966년 당시와 영화의 개봉시점인 반환 전후의 시기가 겹쳐서 느껴지게 합니다. 그걸 생각해보면 저 아이는 1960년대가 아니라 반환전후에 태어난 아이라고 보이진 않을까요.

실제로 반환을 전후해 태어난 홍콩의 젊은이들은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반환 이전의 옛 홍콩에서 성장해온 세대가 아니죠. 우산시위 후 복역중인 조슈아 웡도, 출소 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아그네스 차우도 96년생인걸로 압니다.

출처 [AFPBB] [넷플릭스]


그들을 응원하며, 다소 뜬금없지만 너무나 희망차서 안쓸수가 없는 <중경삼림>의 엔딩크레딧을 인용하며 에필로그를 끝맺고자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게 인간이란 존재이니까요.

새로 뜬 리마스터판도 있지만 엔딩 때의 희망찬 분위기는 오리지널판의 새하얀 배경이 최고라 생각합니다.


과거에 대한 회고는 과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건 곧 현재에 대한 해석을 바꾸고 미래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죠.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모든 과거회고적 텍스트는 미래에 대한 비전 또한 품고 있다라고요.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그러합니다.


홍콩에 미래를 기원하며-


https://youtu.be/R0hSKwG_IPk?t=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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