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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로 Nov 18. 2022

수능 보다가 감성을 찾은 순간

평가원이 마련한 몇초여간의 낭만

2011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고 넓어진다

-정채봉, <첫 마음>-



수능이 끝났다. 여느해처럼.


옛날만큼은 아니라해도 수능은 여전히 대학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험이다. 이전만큼은 아닌 이유는 수시모집의 비중확대 때문이지만, 그래도 많은 수시전형에서 최저등급적용이라는 식으로라도 수능성적은 최소요건으로 크게 작용한다.




대학입시로 한국사회에서 20대로 나아가는 첫 출발인 대학과 전공이 결정된다. 장래에 무엇을 하게 될지의 가능성과도 연결된다. 이 시절 청춘에 걸맞을 상콤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꿈이라 할 수 있겠지.



2022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이해인, <작은 노래 2>-


2023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한용운, <나의 꿈>-




이걸 위해 한국의 10대는 자신의 삶의 일부를 수험에 부여하는 시기가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조금씩은 겪어봤을 것이다. 한창 모든게 재밌을 시기에 놀거 못놀고 재미없는 교재 앞에서 낑낑대야만 한다.


2006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

정지용, <향수>




그리고 그 시간의 성과에 있어 이 가장 큰 시험은 단 하루에 결정난다.


2015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

문태주, <돌의 배>




한국사회를 엄혹한 경쟁사회라 한다면, 그게 한 사회라는 큰 단위의 차원에서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첫 경험은 대학입시 수능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한국인의 열망과 긴장, 환호와 좌절의 그 모든 감정이 집대성되어 있다. 나는 한국사회 성원들이 생각하는 '공정' 개념은 상당부분 시험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감정과 맞닿아있다 생각하고 있다.(언젠가 길게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2009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윤동주, <별 헤는 밤>


2008

손금에 맑은 강물이 흐르고

-윤동주, <소년>-


2016

넓음과 깊음을 가슴에 채우며

주요한, <청년이여 노래하라>




이 날, 시험장은 어느곳보다도 고요하나 그 어디보다도 치열한 열망으로 명멸하는 곳.


2010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2013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정한모, <가을에>


2014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박정만, <작은 연가>




수능 시험지를 받고 종이 울리면 시험지를 펼쳐 맨처음 해야할건 수험번호 등 인적사항을 OMR에 옮기는 것도 있겠지만 뜻밖에 시구 하나를 손수 내 글씨로 답안지에 적어넣어야 한다. 필적확인문구다.


05년 이래로 도입된 문구이지만, 그래도 순간 몇초정도는 엄혹한 경쟁의 시름을 잠시 잊을만은 해 보인다.

이런게 엄혹한 경쟁인 입시시장에서 수능을 출제하는 기관인 평가원이 힘든 싸움을 앞둔 수험생에게 몇초만이라도 그 무게를 덜어내주고자 마련한 나름의 갬_성은 아닐까 생각한다.


평가원은 면밀한 검토를 거쳐서 무슨 시구를 수험생들이 써보게 할지 택했으리라. 부득이 경쟁에 합/불합을 나누는 시험을 내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엄혹함 앞에 선 앳된 수험생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오기라도 하는듯이.


2012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황동규, <즐거운 편지>


2019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김남조, <편지>




시험장의 수험생은 그 누구보다도 홀로 있는 순간에 처한다. 어느때보다도 여태까지 애써온 나 자신에 대한 온 감각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2020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박두진, <별밭에 누워>


2021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나태주, <들길을 걸으며>




그 시간을 견디며 이들은 다들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2007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정지용, <향수>





이들에겐 무엇이 남을까. 청춘들을 응원하며, 그리고 그 청춘을 거쳐온 우리 모두를 응원하며-


2018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김영랑, <바다로 가자>




*시구 뒤에는 시인과 시 제목을 표기하였다. 시구 앞의 숫자는 해당 시구가 필적확인용으로 쓰인 수능 학년도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수능을 치르고 입학한 대학의 23학번이면 앞에 2023으로 표기된 시구가 여러분이 OMR카드에 손수 썼던 필적확인 문구이다.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이 정지용이다. 그것도 <향수> 단일작에서만 세 번. 과문한 나지만 한국말 시 중에서는 정지용 이상의 시인을 여태 본적이 없다. 난 근현대기 한국 최고 시인은 여전히 정지용이라 생각한다. 윤동주가 동경한 시인이라지. 그럴만하다.

그 다음으로 많이 채택된게 윤동주다. 윤동주.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시를 모르는 사람도 윤동주는 안다. 정지용은 읽을 때 감탄하며 보게된다면 윤동주는 특유의 그 젊은이의 감성이 마음에 짙게 남는다. 우리의 윤동주는 영원한 청춘이다.


*시가 없어져가는 시대에 잠시라도 시구의 가치를 느낄만한 흔치 않은 기회기도 하다. 여유가 된다면 위로 가서 시구만 따로씩 다시 음미해보는거도 괜찮아보인다.


[출판작가이신 즐겨찾기님(https://brunch.co.kr/@doram2000)과의 대화중 생각이 나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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