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아
30대에 들어설 무렵부터, 나이 먹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된 탓인지 시간이 흐르는 것에 무뎌졌다. 한 달 한 달 월급날을 기다리던 탓인지 오히려 시간이 빠르게 흘렀으면 했다. 어쩌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에 익숙해졌다. 지나간 시간이 아쉽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고, 다가올 내일이 기대되었다. 나쁘게 말하면 오늘만 버티며 살았고 지나간 날들을 돌이키고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오늘 하루만 잘 넘기면 그만이었다.
갑자기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내 인생에서 손꼽는 여유로운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어느덧 다섯 달이 지났다.
처음 두 달 동안 남미를 여행할 때만 해도 두 달도 충분히 길었다. 두 달이면 남미를 다 여행할 수도 있는데 아직 네 달이나 남았다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약간은 지루함을 느꼈다.
그러다 충격적인 쿠바를 접했고 하루하루를 긴장하며 보냈다. 여차저차 멕시코로 탈출한 후, 문명의 행복함에 젖어 있다 보니 금세 한 달이 넘게 지났다. 6월의 시작과 함께 유럽 땅에 들어섰다.
유럽엔 엄청난 장점이자 단점이 공존했다. 우리가 흔히 유럽여행을 갈 때 서너 곳을 묶어서 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유럽연합과 인접성.
나라 간의 이동이 마치 도시 간의 이동처럼 국경의 허물이 없는 데다, 교통과 화폐 등 관광 인프라도 잘 되어있다. 크게 끌리지 않는 곳이라도 안 가자니 뭔가 아쉽다.
체코를 갔더니 세 시간 거리의 독일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헝가리를 가려고 했더니 가는 길에 있는 슬로바키아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게 순간순간 급변하는 여행 일정을 계획하고 소화하다 보니 또 한 달은 금방이었다.
문득, 지나온 개월 수가 아닌 남은 개월 수를 세는 게 편해져 있었고, 이제는 다섯 달마저도 지나 6개월 여정의 끝이 보인다. 아직 약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지만, 이제는 정말 귀국 날짜를 특정해야 했고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끝을 준비해야 한다.
이대로 여행을 끝내야 한다는 게 아쉽다. 앞으로 장기여행이라는 기회가 다시는 안 올 수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편, 이런 여행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귀국 후의 복직, 살 집과 같은 인생의 큼직하고 중대한 부분이 지금 너무 불안정하다. 한시라도 일찍 돌아가서 이것저것 처리하고 싶다. 이미 안정이 중요한 나이가 되었다.
안정된 수입원이 있고, 누구나 납득할만한 여유를 갖춰놓고 여행을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역시 답은 건물주인가.
조물주보다 높다는 건물주를 내가 과연 할 수는 있을까. 여행 따위는 제쳐두고 돈 벌고 모으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산다면 언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여행 다니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돈을 벌기 위해선 여행을 포기해야 한다. 꼭 여행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을 벌지만,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역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당장의 가장 큰 걱정은 집이다. 전셋값이 얼마나 오를지, 백수 신분에 대출은 될지 걱정이 태산이다. 한국에라도 있으면 이것저것 부딪히며 알아볼 텐데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인터넷 검색뿐이다. 한계가 있다.
‘안되면 이사 가면 그만이지!’ 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이사할 집을 알아볼 수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나는 내 삶이 나이와 비례하여 업그레이드 되길 원한다. 현실적으로 지금은 지금보다 더 나은 집으로 이사 가기 어렵다. 이 집을 지켜야 한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그녀가 조금은 나의 의견에 동조하게 됐다는 것이다. ‘집 따위는 속박일 뿐이요, 나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리라!’ 외쳤던 그녀가 집을 사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겨 기쁘다. 같은 목적을 두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언제나 든든하다.
물론,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은 변함이 없다. 돈을 벌어 여행하기 위함이다.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싶다. 맨날 돈, 돈 노래를 부르지만 사실 돈 없어도 사는 데 별 지장은 없다는 주의이다. 오히려 직장과 돈은 상징적인 의미이자 명분에 가깝다. 떳떳하게 놀고먹기 위한.
여행 와서 삶의 질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돈은 좀 못 벌어도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이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일주일에 축구를 두 번씩 하고, 주말마다 그녀와 놀러 다닐 수도 있을 텐데. 낮잠 시간까지 있다면 기꺼이 아침형 인간도 될 수 있을 텐데.
그녀가 걱정을 하는 게 하나 있다. 내가 회사에 복직하면, 금세 회사생활에 동화되어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되니 좀 더 여유 있게 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참 좋은 아내이다. (막상 현실이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나도 걱정이다. 현실로 돌아가면, 가족이든 사회든 내가 만든 테두리 안에서 적어도 예전만큼의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인정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녀의 바람대로 사실은 나의 바람대로 열심히 살지 않고 적당히 살 수 있을까. 여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까.
주저리주저리 길게도 썼지만 쓰고 보니 결국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용기 없는 한 남자의 넋두리였다. 용기를 찾아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막상 용기를 찾지 못할까 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용기 없는 한 남자의 넋두리였다.
그래서 지금의 심정이 딱 그렇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세계여행 사진들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