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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훈 Jul 29. 2019

여행에 미친 여자와 결혼했다

21) 엄마


기내에서 본 이스탄불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활주로를 달렸고, 이내 날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이스탄불의 야경이 펼쳐졌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피곤함을 토로하던 그녀는 비행기의 소음, 기내방송, 승객들의 잡담 소리 등에도 불구하고 잠에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스탄불의 반짝거리는 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터키를 떠나 이집트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가족 대화방에 조금은 신나 하며

 “이제 피라미드 보러 이집트에 갑니다.”

 하며 행선지를 알렸고, 늘 그렇듯 항상 몸조심하라는 엄마의 답장이 왔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을 담아 다시 답장을 했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네유.”

그리고,

 “그러네. 많이 보고 싶다.”

 갑자기 무언가가 올라오며 눈이 뜨거워졌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소도 상황도 그리고 내 나이도 그래서는 안됐다. 주책이었다. 하지만 잘 참아지지 않았다. 아니, 참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떠올리면 항상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아들, 내가 우리 아들 때문에 산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자주 나에게 하던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형편이 좋지 않았고 자연스레 부모님의 다툼도 잦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힘들 때마다 주문처럼 내뱉은 말인 것 같다.


 하루는 너무나 지쳤던 날이었는지, 나의 투정을 참지 못하고 매를 드셨다.

 울다 잠든 그날 밤, 나는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매를 맞아 멍든 부위를 달걀로 문지르며 흐느끼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는지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 후로도 엄마는 한참을 미안하다고 되뇌며 나를 만져주었다.

 엄마도 20대의 어린 나이였다.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열 살이 되던 해, 3학년 1학기를 마친 후 아빠의 고향인 광주로 이사를 왔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최근에 알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정말로 잘 살아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부산에는 아빠가 어울리던 친구들이 너무 많았기에,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아예 환경을 바꿔버린 거였다. 이미 이야기가 됐던 건지 아빠는 큰아버지 밑에서 일을 했고, 퇴근을 하면 집으로 곧장 왔다.

 광주로 이사 오고 난 후, 아빠의 귀가 시간에 맞춰 항상 가족이 다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다음 해인 4학년 2학기에는 내가 ‘올 수’인 성적표를 받아 와서, 부모님이 나를 백화점에 데려가 르까프 운동화를 사 준 기억도 난다.


 괜찮았던, 어쩌면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광주에 온 지 약 2년이 지나 5학년이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가 귀가할 시간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었다. 좀 늦는 건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왠지 모를 그 날의 이물감 느껴지는 공기는 잊을 수 없다.

 얼마 후,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엄마는 나에게 동생을 맡긴 후 급하게 나갔다.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는 퇴근길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했다. 헬멧을 쓴 덕에 더 큰 사고는 막았지만 다리를 크게 다쳐 거동을 할 수 없었고 한쪽 눈을 잃었다고 했다. 골반 부위를 다쳐 제 힘으로는 앉지도 못했다. 아빠도 겨우 30대 초반,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다.

 그때부터 엄마는 철인이 되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병원으로 가서 아빠의 대, 소변 통을 갈아주고 아침밥을 먹였다. 집으로 돌아와 도시락을 싸고 나와 동생을 채비시켜 학교에 보냈다. 그리곤 돈을 벌기 위해 공장으로 갔다. 퇴근하면 곧장 다시 병원으로 향해 아빠의 병시중을 들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늘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가 잘 돌봐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나 아빠가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어, 사실 그보다는 입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병원을 가지 않아도 돼서 엄마도 좀 편해지고 아빠의 회복 속도도 좋아서 사정이 나아졌다.


 마음 편히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빠였지만, 고생하는 엄마를 보며 그리고 나와 동생을 보며 절대 편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재활 의지도 강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뼈를 붙이고 근육을 키우려고 헬스장까지 다니며 의지를 불태웠다.

 사고가 난 후 1년 정도 지났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엄마와 아빠가 거실에 앉아 있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투셨나 싶어 조용히 몸을 사리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엄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희 아빠 재수술해야 된단다.”

 아빠는 침묵했다.


 재활 운동이 지나쳤던 걸까, 애초에 수술이 잘 못 됐던 걸까. 뼈가 어긋난 채 붙어버렸고, 다시 그 뼈를 떼어낸 후 붙이는 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땐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지금 생각해도 절망감에 아릿하다.

 그렇게 아빠는 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그 끔찍한 고생은 도합 2년 이상 이어진 걸로 기억한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정말 힘든 시기였고, 그때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들들, 내가 너희 때문에 산다.”








 하필이면 아들만 둘을 낳아서, 특히 살가운 맛이 하나도 없는 나를 낳아서 본인을 꾸미는 것도 여자로서의 삶도 즐거움도 꿈도 모두 잊은 채 엄마로만 살았을 우리 엄마.


 이제야 여유가 생겨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고향인 부산으로 놀러 갈 수 있는데, 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갈 곳이 사라졌다며 슬퍼하는 우리 엄마.

 해 드릴 수 있는 게 걱정 안 끼치고 행복하게 살고, 최대한 자주 찾아뵙는 것 밖에 없네요. 물론, 용돈도 잊지 않을게요. 큰 아들 장가까지 보냈으니 이제 보상받으며 좀 더 누리고 살아도 돼요. 고생은 제가 할게요.

 한국 가면 바로 찾아뵐게요.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부디 건강하기만 하세요. 언젠가는 아주 헤어지겠지만, 그때까지 아프지 말고 웃을 일만 만들어요 우리.

 

 항상 죄송하고 글로 밖에 용기 내지 못해 또 죄송해요.


“엄마 사랑해요.”

 

 p.s - 당연히 아빠도 사랑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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