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미친 여자와 결혼했다

다시 3) 말레이시아가 이런 나라였어?

by 정성훈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에, 말레이시아에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우리는, 특히 나는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수도가 Kuala Lumpur인 것과 그나마 관광지로 알려진 곳인 Kota Kinabalu라는 곳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인터넷은 잘 될까. 오토바이 소음이나 매연은 심하지 않을까. 거리가 너무 더럽지 않을까. 노숙자나 부랑자들이 많으면 좀 불안하던데 치안은 괜찮을까.


갖가지 우려를 가지고 말레이시아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국제공항이라 그런지 꽤 크다고 생각하며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고 유심칩부터 갈아 끼웠다. 예약해 놓은 숙소로 가기 위해 Grab 택시를 탈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데 이건 그냥 큰 정도가 아니었다. 공항에 쇼핑몰이 하나 딸려있었다. 일 년 내내 더운 동남아 국가들은 쇼핑몰이 발달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공항까지 쇼핑몰화 시키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움은 택시를 타고나서도 이어졌다. 교통비를 보니 바로 여기서 살고 싶어졌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차로 약 1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인데도 택시비가 약 20,000~25,000원에 불과했다.


택시를 타고 오는 중에 창밖을 보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Putra Jaya라는 이정표를 봤는데, 찾아보니 심지어 세종시가 모티브로 한 계획도시라고 한다. 다음 한 달 살기는 푸트라 자야에서?


긴장과 설렘으로 피곤을 잊고 있었지만 인천에서 6시간이 넘는 비행을 한 후에 다시 차를 타고 1시간을 달리는 것은 꽤 고단한 일이었다. 힘듦과 연약함의 상징인 그녀 덕에 짐도 다 내 몫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짐부격차

그럼에도 쿠알라 룸푸르의 느낌이 너무 좋아진 데는 날씨도 한몫했다. 더위에 약하진 않지만 체질상 땀이 많아서 걱정한 부분이 있었는데 3월의 쿠알라 룸푸르는 우기라서 그런지 그리 덥지 않았고, 우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리 습하지 않았다.


택시에서 그녀와 이런저런 감상에 빠져 이야기를 나누다 금세 숙소에 도착했다.


속편에서 밝혔듯 우리는 최대 비용을 정해두고 살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낭만만 좇자고 마냥 비싼 숙소에 묵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낭만이 없다면 그 먼 곳까지 갈 이유가 어디 있으랴. 수영장과 헬스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났더니 나름 합리적인 비용에 원하는 조건들이 들어맞는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후기까지 꼼꼼히 읽어본 후 고른 숙소인 만큼 기대를 잔뜩 안고 문을 열었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아직 바라던 수영장도 헬스장도 가보지 못했지만 숙소의 뷰 하나만으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나는 다시 한번 말레이시아에 사과했다. 이렇게나 발전되고 이렇게나 휘황찬란한 나라였다니.

말레이시아가 되게 잘 사는 나라인가? 정치, 경제, 사회 구조 등 말레이시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다.


우리집 야경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비교적 늦은 시각이라 급한 짐부터 풀고 정리했다. 업무에 필수인 인터넷 환경부터 확인했고 안심했다. TV를 켰고 유튜브와 넷플릭스도 아주 잘 작동하는 걸 확인했지만 아쉬운 것도 있었다.


VPN 등을 이용하지 않으면 해외에선 시청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 꽤 많았다. 우리의 최애 프로그램인 '나는 solo'를 볼 수 없다니 너무 슬펐다. 디즈니+도 말레이시아용이 따로 있어 되지 않았고 쿠팡플레이, 스포티비 등도 해외 송출이 되지 않아 전부 해지했다.


침대에 누워 홀린 듯 창밖을 보았다. 하늘의 모양이 다르고 공기의 냄새가 다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커튼을 치고 잠을 청한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것들을 느끼며 그 이물감에 작은 불안이 응어리진다. 불안이 주는 미묘한 묘미에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어 쉬이 잠들지 못한다. 내일 눈을 뜨면 내가 사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적응하여 이 또한 일상이 되겠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여행의 묘미는 불편과 불안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마치 중독처럼 말이다. 나는 여행에 중독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홀로 감상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에 잠못 이루다 문득 옆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첫날부터 아주 잘 잔다. 불편, 불안 이런 거 나 혼자만의 헛걱정인가 보다.


어떨 땐 누구보다 예민한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땐 누구보다 둔감한 것 같은 그녀가 나는 여전히 말레이시아만큼 신기하다. 연구 대상이다.





쿠알라 룸푸르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3주가 지났다. 요즘 아주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수영장으로 향한다.


숙소 8층의 수영장


그녀와 함께 밥을 해 먹고 오후엔 업무를 한다. 시간이 남을 때면 함께 산책을 하고 장을 보기도 한다. 혼자서 이곳이든 저곳이든 무작정 걸어보기도 한다.


흔한 빨래뷰

빨래를 하고 말리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몰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까지 뽀송해진다. 업무를 마치면 함께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두치와 뿌꾸 마빈 박사 아님


업무가 일찍 끝날 때면 운동을 한다. 도심의 한가운데서 네온사인을 보며 트레드밀을 타고 있으면 성공한 사업가가 된 것만 같다. 마치 ‘냉정과 열정 사이’의 마빈이 된 것 같달까.


페트로나스 트윈타워(좌) / 말라카(우)

주말에는 쿠알라 룸푸르의 명소나 말라카 같은 근교로 여행 안의 여행을 다녀온다.


슬슬 다음 달을 어디서 보낼지도 정해야 하는데, 우리는 의논 끝에 Penang으로 가기로 했다.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는 섬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시가지인 ‘조지 타운’이 있는 곳이다. 미식의 도시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젠 걱정보다는 기대와 설렘이 앞선다. 말레이시아가 이런 나라일 줄은 몰랐다. 다시 한번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말레이시아에 심심한 사과를 표하며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말레이시아에 오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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