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알프레드 아들러는 말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열등감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부족함을 인식하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열등감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어디로든 방향을 틀 수 있는 감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가정도 가능해진다.
'열등감은 본래 가치중립적인 감정이 아니었을까?'
물론 열등감의 사전적 의미가 지닌 부정적 뉘앙스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그 이면에는, 이 감정이 사람을 어디로든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 함께 놓여있다. 열등감 이후의 선택이야말로 그 감정의 성격을 결정한다면, 이 가정은 완전히 무리한 말만은 아닐 것이다.
기형도는 그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서 질투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질투를 부끄러운 감정으로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힘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자기 안에서만 맴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멈춰 서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자신을 긴장시키는 에너지로 남는다.
바로 이 지점이 나를 흔들었다.
열등감이 사람을 밀어 올릴 때와, 타인을 향해 비틀릴 때의 차이는 무엇일까.
감정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판단의 속도 때문은 아닐까.
열등감이 꼭 부정적으로 발현되는 순간에는 공통된 장면이 하나 있다.
'나는 저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판단이 너무 이르게 내려지는 순간이다.
못 오를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내게 나무를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일단 위를 쳐다보기라도 해야 가늠이 될 것이다.
아득한 나무 위를 바라보다가, 올라갈 방도가 없을 거라는 확신이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먼저 나무 위에 올라가 있거나, 지금도 오르고 있는 사람을.
그다음 선택지는 단순하다. 올라갈 방법을 찾거나, 올라가려는 마음을 접거나.
나무에 오르고 싶다면 사다리를 가져올 수도 있고, 먼저 나무에 올라간 사람의 방식을 관찰해 따라 해 볼 수도 있다. 아니면 맨몸으로 나무에 오를 힘과 체력을 기르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우리는 종종 다른 선택지를 택한다.
나무를 부정하고, 훼손하고, 잘라내는 쪽을 선택한다.
도끼로 나무를 찍어 쓰러뜨린다면 잠시나마 위로는 된다.
적어도 나무가 이제 더 이상 나보다 높지 않으니까.
나무에서 떨어진 사람은 나와 같은 눈높이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나무를 잘라낸다고 해서 내가 올라설 자리가 생기는 건 아니다.
도끼질은 오직 나만을 지치게 할 뿐이다.
열등감이 힘이 되지 못하고, 파괴로 바뀌는 순간은 바로 여기다.
아들러가 말한 열등감의 출발점과, 기형도가 보여준 질투의 종착지는 어쩌면 아주 가까이 있다.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굳이 사라질 필요도 없다.
문제는 그 감정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다.
열등감은 방향을 얻지 못하면 쉽게 오해로 변한다.
그리고 그 오해는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가장 빠르게 번진다.
위로 오르지 못한 힘은,
옆을 긁어버린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_기형도
마음속에서 이유 없이 날 선 감정이 맴돌 때
그 힘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잠시만 늦게 결정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러워 숨길수록 왜곡되고,
급히 판단할수록
방향을 상실하는 감정이니까요.
한가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