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꽃>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이 시구에만 머물렀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정체성이 생긴다는 게
누군가를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로 바라본다는 말인지,
아니면 너무 쉽게 규정해 버리는 말인지 선뜻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누군가의 시선 하나로 사람이 그렇게 간단히 정의되어도 되는 걸까.
그 무렵, 여름날 동료 선생님들과 교정을 거닐다 화단에 핀 수국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같은 화단에 핀, 같은 크기의 수국이었다.
그런데 어디는 연한 분홍색으로 피었고, 또 몇 미터 떨어지지도 않은 곳엔 짙은 파란색으로 피었다.
참 희한하다고 하자, 꽃을 좋아한다던 한 선생님께서 알려주셨다. 수국은 심어진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고.
같은 꽃이지만, 놓인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색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낯설기보다는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라서.
나는 어떤 자리에서는 유난히 말이 가벼워진다. 실없는 농담을 먼저 던지기도 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기도 한다.
그런데 또 다른 자리에서는 말들이 안쪽으로 접힌다.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침묵 속에 머물고, 차분하게 앉아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
그 두 모습 중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혹은, 둘 다 나일까.
나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던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냉정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예전의 나는 그 엇갈린 평가 앞에서 어느 하나는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쉽게 단정하지 못한다.
그 사람이 거짓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놓인 '흙'이 달랐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단순히 정체성을 하나로 고정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한 면을 불러내는 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색 가운데,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 하나의 색을 바라보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꽃은 하나지만, 피어나는 색은 하나가 아니듯이.
나는 종종 사람을 하나의 색으로 고정해두려 했다. 내가 본 모습으로, 내가 들은 말로.
하지만 수국 앞에서 배운 것은 이것이다.
색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꽃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
그가 나에게 '몸짓'으로 다가오든, '꽃'으로 다가오든 모두 '그'의 모습이라는 것.
그가 어떤 색으로 피든, 그 또한 그 사람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_김춘수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누군가를 하나의 색으로 고정하지 않고,
어떤 흙에서 피어나고 있는지를
잠시 지켜보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옆에 서 있는 동안은,
조금 덜 거칠고 덜 메마른
공기가 되어주는 것.
한가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