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에 남은 시간

Allen Ginsberg, <Some things>

by 한가온

부모님 댁에 가면 오래된 피아노가 작은방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올해로 스물일곱이 된, 제법 연식이 있는 피아노다.

부모님에게 이 피아노는 애물단지다. 특히 엄마는 몇 번이고 피아노를 버리자고 말했지만, 번번이 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때마다 엄마는 물었다.


“저 오래된 걸 왜 버리질 못 해?”


일단 나는 공동 주택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집에 들이기는 어렵다. 또 본디 악기란 선율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 기능이 있는데, 나는 남들의 기대치만큼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그러한 연유로 본가에서 10년을 방치했으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피아노가 자리만 차지하는 거대한 몸뚱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얻다 팔아버리거나 폐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피아노만큼은 쉬이 손을 떼지 못한다. 저장 강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물건 앞에서는 마치 애착인형에 집착하는 어린아이가 된다.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피아노 학원에 가게 되었다. 손등은 달걀 하나 살포시 쥐듯 동그랗게 하고, 손끝으로 건반을 살짝 눌러보라는 별거 아닌 코칭도 얼마나 즐겁던지. 누르는 대로 제각각의 소리가 나는 그 신통한 물건에 매료되어, 허공에 대고 연주 흉내를 내다가 친구에게 놀림을 받은 일도 있다.


왼손으로 ‘도-솔-미-솔-’ 정도의 반주를 넣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나는 결국 피아노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렇지 않아도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였다. 그때는 텔레비전 뉴스만 틀면 당연스레 첫마디가 ‘IMF’였을 시기이니, 예상치 못하게 닥쳐온 커다란 소비에 내 부모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 이후 우리 집에는 악기 회사의 영업사원 아저씨들이 몇 번 드나들었다. 부모님은 200만 원 대의 S사 피아노를 계약했고, 그렇게 우리 집 큰방에 피아노 한 대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피아노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 있어 다양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선사했다. 엄마에게는 스트레스 해소의 창구로, 동생에게는 그야말로 소리 나는 장난감이었다. 우리 남매는 엄마와 아빠를 앉혀두고 말도 안 되는 듀엣곡에 노래를 불렀고, 엄마와 아빠는 그런 우리를 보며 깔깔댔다. 그 시절의 경험들로 나는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기도 했다.


한 번은 엄마에게 물었다. 없는 집에서 어떻게 그 비싼 피아노까지 사줄 생각을 했느냐고.

“사 달라는데 어떡해? 사줘야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뱉은 그 말 뒤에는, 내가 아직 헤아리지 못한 무게가 숨어있다. 그때의 내 부모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렇다.


얼마 전, 방이 세 개인 집으로 이사를 갈까 고민했었다. 결국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원래 살던 집에서 조금 더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신신당부를 했다. 그 ‘애물단지’, 언젠가 꼭 데려갈 테니 버리지 말고 조금만 더 맡아달라고.

그러면 또 묻는다.

“도대체 저 오래된 걸 왜 버리질 못 해?”


아마 대답은 이거다.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지우고 싶지 않아서다.

그 고물 피아노 안에는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던 부모의 마음이 있고, 철없이 꿈만 꾸던 내가 있고, 지나온 모든 시간이 차곡차곡 박혀있다.


나는 물건을 붙잡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 시절의 우리 가족을 붙잡고 있었던 거다. 피아노가 사라지면 그 시간도 통째로 사라질까 봐.

그건 하나의 물건이라기보다 관계의 흔적이자, 시간을 잇는 증거이고,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조만간 본가 작은방 한 구석에 놓인 피아노 건반 한 번 눌러보아야겠다.

나 자신의 일부인, 영원한 나의 것이 된 기억의 소리를 들으러.


어떤 것들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들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_앨런 긴즈버그
낡은 피아노를 보며 깨닫습니다.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다는 것을요.
당분간은 서두르지 않고,
그 마음과 함께 살기로 합니다.
한가온 올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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