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 시절에 직장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 나보다 세 달쯤 먼저 입사했다던 그녀는, 첫 출근 날 자기소개를 막 마친 나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주말에 맥주 마실래요?"
총기 없이 게슴츠레한 눈, 억양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높낮이 없는 말투였다. 왜인지 그 제안이 재미있어 보여 덥석 승낙했다. 이름과 나이도 그때서야 알았다. 똑단발에 오버핏 후드티를 입고 있어 나보다 예닐곱은 어린 줄 알았던 그녀는,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이었다.
약속한 주말, 우리는 알게 된 지 며칠 안 된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정보를 털어놓았다. 아니, 털어놓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속엣것이 '잘못 자른 거북알 아이스크림'처럼 줄줄 새어 나왔다.
서로의 호불호, 가정사, 연애관 같은 날것의 이야기까지 다 알고 나니 가끔은 헷갈린다.
'이 사람이랑 고등학교 동창이었나, 아님 대학 동기였나.'
실제 만난 시점보다 훨씬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진다. 첫 사모임부터 사회적 가면을 벗어둔 채 만났으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유치한 시비를 걸고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장난을 주고받게 됐다.
종종 함께 가는 카페가 있다. 그 동네에서 잘생기고 커피도 잘 내리기로 유명한 바리스타가 있는 곳이다. 서비스 정신까지 좋은 그는, 어느 날 내 친구에게 커피를 서빙하며 오묘한 미소를 건넸고 그날부터 우리는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그와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망상 속에서 내 친구는(여전히 총기 없는 눈을 한 채)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그이'와 팔짱을 끼고 버진로드를 걷고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오열하듯 웃어댔다.
그러다 언젠가 번호를 물어봤다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그의 말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돌아온 그녀를 보며 이제 그만 웃어야지, 하고 다짐했다.
다짐은 실패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이'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 나게 웃는다. 그러면 그녀는 옆에서 꼭 이렇게 덧붙인다.
"나쁜 놈, 왜 잘해줬어."
액세서리를 고를 때도 여전히 유치하다. '짱구'나 '뽀로로' 같은, 초등학생 때나 열광하던 캐릭터를 집어 든다.
어느 날에는 공주 드레스에 화관까지 세팅해서 무려 여덟 달 뒤에나 있을 생일 파티를, 그것도 오후 세 시 주꾸미집에서 열기도 했다.
이상한 건, 아직도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존댓말을 쓰면서, 하는 행동은 죄다 철없던 시절의 그것이다.
엊그제는 아주 이른 아침에 아파트 소독을 담당하는 여사님이 방문하셨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조금 당황했지만, 그분도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최대한 친절한 어른의 태도로 맞아드렸다.
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에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요, 뭐."
"날이 많이 춥죠? 따뜻한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라는, 아주 그럴듯한 말만 골라했다. 스스로 참어른 같이 느껴졌다.
소독을 마치고 여사님은 서명이 필요하다며 종이를 건네셨다.
'어른의 글씨'로 반듯하게 이름을 쓰고 현관문까지 열어드렸다.
그리고 들린 여사님의 마지막 말.
"아휴, 학생이 참 싹싹하네! 말도 잘하고, 글씨도 예쁘고. 학생은 몇 살이야? 응?"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이리가 한 오백 마리쯤 그려진 잠옷을 입은 채 서 있는 나.
존댓말만 쓰는, 그냥 애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