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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나길 Jan 25. 2023

아무개가 아무개에게

영화 <영웅> 리뷰

  -<영웅>/윤제균/한국/2022

  -2시간(120분)

 스포일러 주의! 영화 내용이 가득 담긴 글이므로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저물어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포스터 문구


위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역사에서 아무개들의 역사는 놓치기 쉬워요. …(중략)… 그런데 그 주변 인물, 열심히 살아가지만 이름은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일생을 볼 때면 가슴이 더 찡합니다.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감동이 물밀듯 밀려온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이 시대의 아무개일 테니까요. - 책 <역사의 쓸모> 中


 뮤지컬 <영웅>은 안 봤지만 뮤지컬을 영화화했다고 해서 계속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드디어 봤다!


 영화를 보기 전엔 제목의 '영웅'이 안중근 의사를 칭하는 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니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 독립운동에 가담한 분들과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민중을 포함한 모든 이를 가리켜 영웅이라고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안중근을 위인으로 배우고 인식하고 있지만 안중근은 역사에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크게 남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


 영화에서 안중근은 '영웅'들의 대표적인 얼굴로 나오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는 영웅은 안중근 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수많은 아무개 영웅 중 안중근 의사에 주로 초점을 맞춰 흘러간다. 안중근은 대의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그는 전쟁포로였던 일본 군인들을 죽이지 않고 풀어주는데, 이로 인해 많은 동지가 죽는다.


  그런데 사실 난 대의명분이라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큰 사안, 이를테면 나라와 나라의 문제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야 너네 이거 지켜', '너네 이거 하지 마' 라고 주장하려면 그걸 주장할 수 있게 내게도 합당한 명분(난 지켰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가 안 좋았고… 상황도 안 좋았다.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그가 내린 선택의 결과는 뼈아팠다.


 그 후 배경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고 안중근과 동지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열차를 타고 올 거라는 정보를 전달받는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총으로 쏠 계획을 세운다.



https://tv.naver.com/v/32527905

영화 속에 나오는 노래 '배고픈 청춘이여' 중. 이 장면을 볼 때면 귀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영화의 분위기를 엄숙하게 이어나가면 당시의 비장함이 살아난다는 장점이 있지만, 당대의 사람들이 우리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인물들처럼 느껴질 수 있다. 중간중간 생각지 못하게 튀어나오는 웃음코드는 이들을 친숙하게 우리의 곁으로 가까이 끌어온다.


 특히 유동하와 마진주는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 있었다면 평범하게 학교도 다니고, 풋풋한 첫사랑도 하며 평온한 일상을 보냈을 것이다. 영화에서 그려내는 독립운동가들의 소소한 일상과 웃음, 사랑은 당대의 참혹한 현실과 대비되어 슬픔을 자아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의 소소한 일상 뿐 아니라 망설임, 두려움도 담아냈다는 점이다.


 추격전 후 겁에 질린 유동하와 죽기 전 머뭇거리는 설희, 거사 직전에 긴장해서 떠는 우덕순과 조도선의 모습, 사형대에 오른 안중근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담긴 두려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 망설여지고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 일의 결과가 어찌될지 도저히 알 수 없기에 더더욱.



 영화에서 '하늘이 내려준 운명'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진 운명에 대한 관점을 거칠게 축약하자면, '운명이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운명이란 말은 선택이나 상황에 대한 합리화가 되기도 하며 확신을 갖기 위해 꽂는 깃발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정말 하늘이 준 운명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아마 때때로 그런 확신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토록 두렵고 망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도저히 알 수 없는 미래를 앞두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아닐까. 영화 <암살>에 나오는 친일파 염석진의 대사를 돌아봐도 알 수 있다.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영화에서는 민중-아무개를 계속 비춰준다. 거사 전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실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사진이 스쳐 지나가는 게 인상적이다.


 해방된 후 상당히 시간이 지난 현대에 사는 우리에겐 조선의 독립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예정되었던 일 같다. 그러나 영화 <영웅>의 시대인 1910년대와 영화 <암살>의 1930년대를 돌이켜보면 이미 일제에 강제로 점령된지 몇 십 년의 시간이 지나 있다.


 조선이 독립할 수 없으리라 확신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고, 조선의 독립을 믿더라도 한 치 앞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소소한 일상을 보내며 웃던 마두식과 진주가 죽은 것처럼.


 그런 상황에서도 독립을 위해 움직이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걸어간 사람들이 있다. 그 길을 걷다 중간에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들이 그 길을 끝까지 걸었기에 지금의 한국이 있고, 그들이 갈망하던 미래가 현재가 되어 존재하는 거겠지.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요, 그 갈망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한 시대의 꿈이 이루어져서 다음 시대가 와요. 이걸 알게 되면 굉장히 설렙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꿈은 뭘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언제 오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 책 <역사의 쓸모> 中


 먼저 살아간 이들이 갈망하던, 그들이 소중히 여긴 것들을 이어받은 현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영화를 보며 그것들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기억에 남는 건, 안중근이 '코레아 우라'라고 외치던 장면이다. 당연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 줄 알았던 장면에서 "코레아 우라"라고 외치는데 순간 전율이 흘렀다.


 한국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타국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 말을 외쳤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 짧은 말을 통해 이게 단순한 살해가 아니며, 나의 모국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알리는 것만 같았다.



 영화 속에 광활한 눈밭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 새하얀 눈밭은 붉은 피를 더 도드라지게 하기도 하지만, 민족의 겨울을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조선의 겨울은 영화 <암살>의 시대를 지나 그후로도 오랜 시간 지속된다.


 길고 긴 겨울이 지난 지금, 내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아무개라면… 우리의 갈망의 힘으로 다음 시대가 온다면 나는 어떤 희망을 그려볼 수 있을까?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앞두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무개들의 이야기를 보며, 그리고 아무개의 하나였던 안중근 의사의 삶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https://tv.naver.com/v/31434775





사진출처:

https://pixabay.com/images/id-4668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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