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를 쓰게 된 계기
나는 귀찮은 걸 정말 싫어한다. 그러니 당연히 지속성이 필요한 일기나 다이어리 같은 건 나와 절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분명 평생 쓸 일 없다고 확신했던 다이어리를 갑자기 쓰게 된 건 늘 그렇듯 생각지 못한 일이 계기가 됐다.
내 기억에 지인이 살 게 있다고 해서 문구점에 따라갔던 것 같은데, 노트며 문구류를 기웃기웃 구경하다 우연히 마음에 쏙 드는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아, 표지는 정말 마음에 드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결코 쓸 일이 없는 '다이어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쓰지도 않을 걸 사서 쟁여놓을 순 없었기에 맹렬한 고민에 잠겼다.
아니 잠깐. 왜 내가 이걸 사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쓰면 되잖아, 쓰면!
평생 쓸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다이어리를 쓰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물욕. 난 그냥 그게 갖고 싶어서 다이어리를 어떻게든 써보기로 했다.
내 첫 다이어리.
이제 다이어리를 샀으니 미래에 합리화를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써야 했다.
다이어리는 월간(먼슬리)+프리노트만 있는 간단한 양식이었지만, 당시 나는 이 다이어리를 도대체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감이 안 왔다.
일단 써보기로 했으니까 스케쥴이나 그날 있었던 인상적인 일을 적기로 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쓰기만 하면 되지 뭐.
'오늘은 이런 진상손님이 왔다.'
'친구들이랑 어디서 뭐하고 놀았음.'
'엄마가 초코밥을 해줬다.'
이런 간단한 메모에서 시작했고, 별 의미없이 끄적였다. 그런데 그게 나중에 보니 꽤 재밌었다.
'아 맞아. 이 달엔 이런 일이 있었지!'
'이런 걸 왜 잊고 있었지?'
점점 기록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니 그 작은 칸이 일상적인 일들로 미어터지기 시작했다.
변천과정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귀찮은 걸 정말 싫어한다. 재밌든 어쨌든 귀찮으면 안 할 거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내 다이어리는 (그나마도 귀찮으면 빼먹어서 듬성듬성한) 간단한 기록과 오직 검은 펜으로만 쓴 글자들로 채워졌다.
귀찮으면 하지 말자. 그게 지금까지 내가 다이어리를 쓰면서 누누이 떠올려 온 생각이다. 사실 난 내가 이렇게까지 다이어리 쓰기를 오래 지속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러 양식의 다이어리를 쓰면서 내게 맞는 양식과 내게 맞지 않는 양식을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 내가 왜 다이어리며 계획표를 제대로 지속하지 못했는지도 알게 됐다. 난 빽빽한 계획에 묶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데, 또 그렇다고 아무런 계획이 없어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참 복잡도 하다. 이러니 내가 계획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만 생각했지.
내가 월간(먼슬리)과 주간(위클리), 프리노트가 있는 양식을 선호한다는 것도 알았고 만년 다이어리는 귀찮아서 절대 지속을 못하겠구나, 하는 것도 알았다.
다이어리에 다른 색의 펜(빨강, 파랑)을 사용하게 된 것은 2018년에 와서다. 매일 다이어리를 빼먹지 않고 쓰게 된 것(몰아서 2-3일치씩 쓰기도 했지만)도 2019년에 와서였다. 그 사이 다이어리를 쓰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2021년에는 6공 다이어리로 내가 양식을 만들어서 쓸 생각이다. 세상에, 만년 다이어리도 절대 못 쓴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양식을 일일이 만들어 쓰겠다고? 처음 다이어리를 샀던 과거의 나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은 '절대'라는 확신을 함부로 가지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내 다이어리들.
현재 쓰는 양식
내가 현재 쓰는 다이어리 양식은 예전과 비교하면 참 많이 세세해졌다.
<지난 해 감사했던 것들> - 지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한 일들을 적는다.
<올해 바라는 것·목표> - 말 그대로 올해 바라는 것들을 적는다. 목표라곤 하지만 이걸 반드시 이뤄야겠다는 마음으로 적는 건 아니다. 올해 이런이런 것들을 하면 좋겠네~ 올해는 이걸 했으면 좋겠다. 뭐, 어떻게 될 진 모르지만!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내려간다.
<상반기 목표>, <하반기 목표> - 마찬가지로 상반기(1~6월), 하반기(7~12월)에 이런 것들을 하면 좋겠다 싶은 걸 적는다. 물론 이걸 할지 안할 지는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반기, 하반기 목표를 한 번에 새해 초에 적지는 않는다는 거다. 너무 체계적으로 하면 숨막혀서 탈주할 게 뻔하기 때문에… 상반기 목표까지만 적고 6월에 상반기를 돌아보며 하반기 목표를 적는 식으로 하고 있다.
<X월 목표> - 이번 달에 이걸 목표로 하자, 라는 생각으로 적는데 위의 목표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적는다.
<월간(먼슬리)> - 일정, 시작한 것, 한 일 등.
<X월(한달) 돌아보기> - 월말 정산. 한 달이 끝나면 그 달이 어땠는지를 이룬 것, 시작한 것, 지속중인 것, 변경·보완할 것으로 정리해 적는다. 한달 동안 적은 다이어리를 읽어보며 소감도 적는다.
<주간 목표> - 한 주의 목표를 적는다.
<주간(위클리)> - 그 날 하루하루 있었던 일들을 적는다. 일기라기엔 애매한데 그냥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이나 한 일들을 기록한다.
<되돌아보기(주간)> - 한 주를 돌아보며 소감이나 반성 등을 적는다.
<프리노트> - 일기나 생각들을 적는 용으로 쓰고 있다.
<20XX년을 보내며> - 12월 말에 새해를 맞이하기 전, 1년 동안 적은 다이어리를 읽고 그 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소감이나 반성, 감사한 일 등에 대해 간략하게 적는다.
그 밖에는 읽은 책과 본 영화, 전시회 등을 날짜, 제목 등과 함께 기록하고 있다.
현재(2020년 3월 기준) 추가한 것
1. 월간 - 책, 영화 등 기록
작년부터 책 기록 어플(책꽂이+, 데일리북 Pro)에 읽은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기록들이 파편화되는 것 같아서 여러 기록을 다이어리를 통해 한 눈에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다이어리 월간(먼슬리) 부분에 읽은 책과 영화 등을 적어두기로 했다.
책꽂이+와 데일리북 어플에서는 다 읽은 책을 이렇게 월별로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 어플들과 밀리에서 받은 달력을 참고해 다이어리에는 책 제목과 평점만 기록한다.
2. 체크하기
그 밖에도 친구가 쓰는 불렛저널의 양식을 참고해서 그 날의 기분상태나 식사량 등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3. 테마 정하기
하루의 테마를 정해서 그 날 하루는 주로 그것에 집중하는 방식도 시도해보고 있다. (ex. 내일 테마를 '책읽기'로 정하면 그 날 하루는 책읽기에 주로 몰두하는 식)
4. 책, 영화 감상 기록
원래 독서기록은 에버노트에 인상깊은 구절과 함께 정리하는데, 그것도 좋지만 다이어리에서 어떤 시기에 한 생각이 어떤 콘텐츠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모아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둘 다 쓰기로 했다)
이번에 100밀리 이벤트 경품을 받은 김에 그것도 활용해볼까 해서 쓰고 있고, 올해 써보고 양식을 다듬어 내년에도 쓸 예정이다.
아래는 다이어리에 추가한 간략한 감상 양식들이다.
*악필주의
소설 양식 일부
영화 양식 일부
다이어리 쓰기의 장점
아무리 선명하게 기억한다 한들, 그 당시의 기록만큼 생생한 기억은 없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 속에 그때의 기억을 윤색하거나, 그 당시에 대해 어느 정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다이어리의 장점은 과거 내가 했던 생각과, 내게 일어난 일들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과정들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근간이 어디에 있는지 등을 돌아볼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다.
무엇보다 다이어리는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특히 나처럼 성취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은 고작 며칠이라도 눈에 띄는 성취가 없으면 자책하고 쉽게 우울감에 잠길 수 있다. 그럴 때 다이어리를 꺼내 읽어보면 최근 제대로 한 게 없다는 느낌이 내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통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골몰해 내가 해낸 것들은 무심히 지나치곤 한다. 그럴 때 다이어리를 꺼내보면, 지금은 내게 당연한 그것들을 언젠가는 성취하기 위해 애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다이어리는 내 삶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나침반이자, 나에 대해 알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다.
다이어리를 쓰는 것은 번거롭다. 꼭 써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 삶을 기록한다는 것, 나에 대해 기록한다는 것은 분명 내가 모르던 것들을 알려준다.
혹시 다이어리를 쓰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귀찮지 않은 선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보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