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리>/옥타비아 버틀러/박설영/프시케의숲
-출간연도: 2020 (2005)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담긴 글이므로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고 몸은 치명상으로 가득하다. 눈마저 화상을 입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동굴 안에 혼자 있었던 건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몸이 회복되고 걸음이 닿는 대로 내려가보니 불에 타 폐허가 된 한 마을이 보인다. 생존자는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자신도 여기에 살았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나'는 도로를 따라 더 내려가다가 차를 운전해서 지나가던 한 청년과 마주친다. '나'는 그 청년, 라이트의 피를 마시고 그의 도움을 받아 점차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였는지 알아가며 잃어버린 기억 너머의 숨겨진 진실들을 찾아간다.
'나', 즉 쇼리는 이나라는 존재였다. 이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흡혈귀라고 일컫는 존재로,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폐허는 쇼리가 대어머니들, 어머니들, 자매들과 그들의 공생인과 함께 살던 공동체였다. 쇼리를 제외한 이들은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아 모두 죽고만 것이다.
쇼리는 자신의 흔적과 기억을 더듬어가며 누가 자신의 가족들을 살해한 건지, 누가 자신을 노리는지 그 내막을 서서히 파헤쳐 간다.
<쇼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 전개방식과 특유의 세계관이었다.
우선 기억을 잃은 쇼리가 점점 사물과 세계를 지각해가고 잃어버린 세계관을 찾아가는 묘사가 흥미를 끌었다. 이게 루즈하지 않고 엄청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쇼리가 기억을 잃었기에 독자는 쇼리와 함께 자취를 더듬어가며 이 소설의 세계관과 이나라는 종족에 대해 알아갈 수 있게 된다.
이나라는 종족에 대한 설정과 공생인의 설정도 흥미롭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비틀어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낸 것이 재밌었다. 내가 원래 변주를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이나와 이나의 관계, 이나와 공생인의 관계가 좀 특이한데, 가끔 정신이 좀 아찔해질 때도 있었다. 아니 뭐 이나라는 종족한테는 그게 당연한 거니까 그럴 수도 있긴 한데..... 나는 유교걸이라서........
그런데 다른 공생인(대충 이나의 인간 파트너라고 생각하면 됨)들은 그렇다치고 라이트는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이나 세계로 들어왔는데 이나의 사고방식을 너무 강요당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했다.
인간에게는 일반적으로 1대 1의 독점적 관계가 당연하게 여겨지니까. 라이트라는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별개로 라이트를 볼 때면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이나와 공생인은 상호 공생하는 관계라고 말로는 그러는데, 공생인은 이나에게 중독돼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데다 당장 원래 하던 일이나 일상에 어쩔 수 없이 지장이 가고, 자기 이나와 많이 멀어지지도 못하고 이나가 죽으면 대체로 공생인도 죽는다고 볼 수 있어서 이게 진짜 공생하는 관계가 맞나.... 너무 치우쳐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뭐 젊은 외모를 유지할 수 있고 체력도 좋아지고 수명도 길어지니까 그게 이득이라면 이득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나라면 그걸 감안해도 공생인으로 살기 싫을 것 같다.
하긴 쇼리가 기존의 기억을 잃었으니 쇼리의 공동체에선 이나와 인간의 또 다른 방식을 만들어갈 수도 있겠지... 그냥 라이트가 체념하고 이나 사회에 스며드는 게 더 가능성 높아보이지만.
이나는 인간과 달리 인종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나에게는 이나의 혐오와 차별이 있다.
그 길고 긴 이나의 역사에서 인간들은 이나를 두려워하고 죽여왔다. 이나는 인간들의 혐오로 얼룩진 역사 속에 휘말려 한 곳에 자리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터전을 옮겨왔다.
혐오가 혐오로 이어지고 두려움은 폭력을 낳는다. 쇼리는 흑인 공생인의 유전자를 이나 유전자에 섞어 낮에도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든 유전자 조작의 결과다. 즉, 이나들에겐 빛나는 가능성이자 이질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기껏 몇 백 년에 걸쳐 쇼리의 대어머니들(대충 인간 족보로 치면 할머니)과 어머니들이 유전자 조작 기술을 발전시켜 성과를 얻어냈는데, 두려움과 두려움이 빚어낸 학살이 그 모든 걸 앗아갔다. 반짝이는 가능성이 휘발된 것이다.
오랜 연구의 성과가 너무 아깝다. 당장 쇼리와 쇼리의 자손들은 그 혜택을 볼 수 있겠지만 결국에 이나의 피가 섞이고 섞여 희석되면 낮에 약한 특성은 그대로일 텐데.
편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좀 더 열린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면 이나의 약점인 '낮'의 치명적임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그러고보면 이 소설의 배경이 미국이라는 것도 이야기 진행에 큰 몫을 한 것 같다. 만약 배경이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우리나라같은 행정 시스템이 있는 나라에서 이나들은 어떻게 서류조작을 하고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마을을 불태운다라....... 흠........ 우리나라에서............... 는 아무래도 역시 어려울 것 같지?
아무튼 우리나라였다면 이나끼리 어쩌고 저쩌고 하기 전에 인간 경찰들도 얽혀서 일이 더 복잡해졌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땅도 좁고 CCTV도 곳곳에 있으니까. 이 책이 나온 시기가 2000년대 초반이라는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사실 읽으면서 반전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너무 통수에 통수에 통수를 때리는 걸 많이 봐왔나보다. 그래도 작품 자체로 봤을 땐 한 권으로 짜임새있게 완결난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나의 여신 신화에 대해서라던가... 좀 더 알고 싶고 궁금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다루려면 후속작에서 다루거나 해야 했겠지. 본편에서 다루려면 산으로 갔을 거다.
작품 자체는 깔끔하게 끝났는데 나는 역시 좀 아쉽다.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앞으로 또 어떤 공생인들이 들어올지도 궁금하고........ 왜 후속작이 없지........... 그래 그럴 수 있지.........
(이 작품이 작가분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작품의 원제는 <Fledgling>로, 어린 새라는 뜻이라고 한다. 주인공의 이름인 '쇼리'는 나이팅게일이라는 뜻이다.(본문에서 그렇댔음)
<쇼리>의 내용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홀로 남겨진 어린 새가 마침내 날갯짓해 자기만의 둥지를 꾸리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아쉬움과는 별개로 작품 자체는 깔끔하게 잘 끝난 것 같다.
참, 소설을 읽으며 찝찝하거나 미묘한 부분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쇼리가 나이로 따지면 53살이라고는 하지만 외형은 10살로 보이고 이나 나이로도 어린애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성관계하는 장면을 보며 미성년자와 성인의 성관계를 보는 것 같아 거북했다.
이나라는 종족 자체가 '좀 어려도 성관계 오케이!' 라는 세계관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생긴 것도 어리고 종족 나이로도 어리면 그건 어린애랑 성관계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읽는 중간중간 계속 탈주하게 됐다. 이게 맞나....
그래도 세계관도 탄탄하고 작가분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도 탁월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