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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Apr 23. 2019

봉건적 인습의 상징인 벽

봉건적 인습의 상징인 벽과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오장환의 시

 1930년대는 파시즘의 강화로 조선 내 반제국주의 사상이 강화됨과 동시에 시단은 시문학파, 생명파, 모더니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시문학파는 지나친 기교 중심의 창작 방법에 치중하며, 모더니즘의 서구 취향의 도시성이 인간 존재와 생명의 본질이라는 내용적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 생명파는 시의 내용적 가치로써의 생명 혹은 인생에 주목하였다. 생명파는 생명의 본질을 원죄와 허무, 동물적인 본능으로 형상화하였으나 인간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는 유리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오장환은 당대 현실의 비인간적 측면을 직시하고 이를 시로 형상화했다는 측면에서 다른 생명파 시인들과 구별된다. 수탈을 목적으로 진행된 근대화의 양적 팽창과 상반된 노동자들의 삶을 담아내거나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의 시속에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30년대에 반제국주의 사상과 함께 반봉건의식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상당히 균형 잡힌 진보적 민족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의미다. 반제국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민족의 논리를 편협하게 해석하고 보수적 민족주의와 폐쇄적 세계관에 머무는 경향이 있고, 반봉건 의식을 가진 진보적인 지식인 중에는 사회진화론에 동의하면서 일제의 논리에 동화되어 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두 가지 사상을 균형 있게 가진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오장환의 시에서 드러난 반봉건의식과 그것이 생명을 부여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지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성씨보(姓氏譜) 오래인 관습 –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1934


  화자가 오씨라는 것을 보아 이는 시인 자신을 두고 지은 시일 것이다. 해주로 이사 온 일청인이 조상이라는 것을 통해 사대주의에서 이러한 관습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족보를 돈으로 사고팔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돌아봤을 때, 그는 자신의 성씨와 계급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자신의 성씨와 가계라는 껍데기가 무겁고 수퉁하다고 말한다. ‘수퉁하다’는 흉하거나 볼품이 없다는 뜻인데, 족보의 가치가 상실한 시대에도 이에 집착하는 봉건의 잔재가 무겁고 볼품없다고 말하고 있다. 족보를 사고팔며 지켜온 가문의 성씨가 무겁고 흉하다 못해 더욱이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오장환의 어머니 한영수는 아버지 오학근과 스물두 살 차이가 났다. 그녀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오학근의 집안에 첩으로 들어가 첫 번째 자식으로 딸을 낳았다. 그 딸의 이름은 다음에는 아들을 낳길 바란다는 의미로 ‘사내 남(男)’ 자를 넣어 남환으로 짓는다. 나중에 한영수는 남편의 이름 가운데 자와 같은 학(學) 자를 넣어 한학수로 개명한 후 본처가 죽고 나서야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다. 오장환을 포함한 그의 자식들도 그제야 서자에서 적자로 호적을 정정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오 씨라는 성을 지키기 위해 그가 겪어야 했던 가문의 행동은 어린 시절 오장환에게 충분히 이기적일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오직 시인의 삶에 국한시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장환의 성장 배경은 그가 17세의 나이에 이 시를 창작할 수밖에 없던 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잘못된 전통 즉 봉건적 관습으로 고통받아야 했던 희생자들에 관한 다른 시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열녀를 모셨다는 정문은 슬픈 울 창살로는 음산한 바람이 스미어들고 붉고 푸르게 칠한 황토 내음새 진하게 난다. 소저는 고운 얼굴 방 안에만 숨어 앉아서 색시의 한시절 삼강오륜 주송지훈(朱宋之訓)을 본받아왔다. 오 물레 잣는 할멈의 진기한 이야기 중놈의 과객의 화적의 초립동이의 꿈보다 선명한 그림을 보여줌이여. 시꺼먼 사나이 힘세인 팔뚝 무서운 힘으로 으스러지게 안아준다는 이야기 소저에게는 몹시도 떨리는 식욕이었다. 소저의 신랑은 여섯 해 아래 소저는 시집을 가도 자위하였다. 쑤군, 쑤군 지껄이는 시집의 소문 소저는 겁이 나 병든 시에미의 똥맛을 핥아보았다. 오 효부라는 소문의 펼쳐짐이여! 양반은 죄금이라도 상놈을 속여야 하고 자랑으로 누르려 한다. 소저는 열아홉. 신랑은 열네 살 소저는 참지 못하여 목매이던 날 양반의 집은 삼엄하게 교통을 끊고 젊은 새댁이 독사에 물리려는 낭군을 구하려다 대신으로 죽었다는 슬픈 전설을 쏟아내었다. 이래서 생겨난 효부열녀의 정문 그들의 종친은 가문이나 번화하게 만들어보자고 정문의 광영을 붉게 푸르게 채색하였다.  「정문(旌門) - 염락(廉洛), 열녀불경이부충신불사이군」
 

 염락은 송나라 때 학자 두 명이 살던 지역의 명칭인 염계와 낙양인 데서 유래된 말로 성리학에 밝은 학자들이 많은 지역을 가리킨다. 열녀는 두 명의 지아비를 겪지 않고, 충신은 두 명의 왕을 섬기지 않는다는 부제의 이 시에는 소저라는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는 송나라의 가르침을 받고 큰 여성이다. 송나라의 성리학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모인 마을에서 낳고 자란 그녀는 13살 신랑에게 시집을 갔다. 시집을 가기 전까지 방안에서만 숨어 살던 그녀에게 할멈이 들려준 바깥세상의 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충족되지 않는 식욕과도 같은 성욕을 자극했고, 그녀는 자위를 했다는 이유로 유교적 봉건사회로 상징되는 가문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자위는 사회 현실이 인간성을 억압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최소한의 자유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비인간적인 억압을 극복하고자 병든 시어머니의 똥 맛을 봐야 했다. 상분(嘗糞)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행위는 단지(斷指)와 더불어 병든 부모를 보필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행위로 인정받아 당대 사회가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효행이었다. 적극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복종하고자 했던 행위조차도 인정받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의 죽음은 가문을 붉게 빛내는 열녀문이 되어 정문에 자리 잡는다. 


 정문은 그 집의 가장 앞쪽에 배치되는 문이다. 오장환 이 정문에 음산함을 느끼고 그 정문 너머에 갇혀 살아왔던 소저라는 힘없는 여성인물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지배 이데올로기 고발한다. 효와 성리학이라는 당시 유교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저 상놈들을 속이고 누르기 위한 명목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들의 광영을 지키기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 문 너머의 여성인물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그는 봉건적 인습에서 죽어버린 소저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굳게 닫힌 높은 문은 내부의 수치스러운 진실은 가리고, 외부의 피지배 계층의 진입을 막아냄으로써 일부 양반 남성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처럼 벽과 얽힌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은 다른 시에서도 드러난다.


세세전대만년성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는 진보를 허락지 않아 뜨거운 물 끼얹고 고춧가루 뿌리던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터거리처럼 지저분하도다. 「성벽(城壁)」 
 

 대대로 만년 동안 번성하라며 지어진 성벽은 편협한 야심을 가졌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보수와 진보는 당대의 정치성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사전적 의미에 가깝다.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보수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를 허락하지 않고, 그 보수가 고착화되어 지저분해져 버린 성벽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벽 너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돌담으로 튼튼히 가려놓은 집안에 검은 기와집 종가가 살고 있었다. 충충한 울 속에서 거미알 터지듯 흩어져 나가는 이 집의 지손들. 모두 다 싸우고 찢고 헤어져 나가도 오래인 동안 이 집의 광영을 지켜주는 신주들 들은 대머리에 곰팡이가 나도록 알리어지지는 않아도 종가에서는 무기처럼 아끼며 제삿날이면 갑자기 높아 제상 위에 날름히 올라앉는다. 큰집에는 큰 아들의 식구만 살고 있어도 제삿날이면 제사를 지내러 오는 사람들 오조할머니와 아들 며느리 손자 손주며느리 칠촌도 팔촌도 한데 얼리어 닝닝거린다. 시집갔다 쫓겨온 작은딸 과부가 되어온 큰고모 손꾸락 빨며 구경하는 이종언니 이종오빠. 한참 쩡쩡 울리던 옛날에는 오조할머니 집에서 동원 뒷밥을 먹어왔다고 오조할머니 시아버니도 남편도 동네 백성들을 곧잘 잡아들여다 모말굴림도 시키고 주릿대를 앵기었다고. 지금도 종가 뒤란에는 중복사나무 밑에서 대구리가 빤들빤들한 달걀귀신이 융융거린다는 마을의 풍설. 종가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일을 안 해도 지내왔었고 대대손손이 아무런 일을 안 해도 지내왔었고 대대손손이 아무런 재주도 물리어받지는 못하여 종갓집 영감님은 근시안경을 쓰고 눈을 찝찝거리며 먹을 궁리를 한다고 작인들에게 고리대금을 하여 살아나간다. 종가 (宗家)


 종가는 오장환이 첫 시집의 제목으로 삼으려고 했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다. 이 시는 유교적 권위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종갓집의 제사 지내는 날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검은 기와집 종가를 가리고 있는 돌담은 어둡고 폐쇄적이다. 흐릿하고 침침한 담 너머에는 자손들의 화목한 모습이 아닌 거미알이 터지듯 흩어져 나간다고 표현한다. 이들은 모두 싸우고 찢고 헤어져 나가는 관계임에도 제삿날이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유교적 종법원리의 상징이며 이 공간 안에 최고의 존중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신주는 희화화되고 있다. “시집갔다 쫓겨온 작은 딸, 과부가 되어온 큰고모, 손꾸락을 빨며 구경하는 이종언니 이종오빠”는 봉건적 지배질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피해를 입은 채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들은 당대 사회의 주체가 아닌 주변인이며 구경꾼으로만 존재한다. 장자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사는 동안 집안의 여자와 이종들은 피해자가 되어있다. 모말굴림은 곡식을 담는 그릇 위에 무릎을 꿇려 무릎이 그 안에 끼이면서 고통을 당하게 하는 형벌이다. 모말굴림과 주릿대로 주리를 트는 형벌을 통해 양반들의 권위는 백성들의 자발적 존중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종가나 신주에 나오지 않는 권위를 혼자 붙들고 있는 종갓집 영감은 일도 하지 않고, 재주도 없는 채로 소작인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며 살아간다. 종가라는 봉건적 권위를 이어받은 듯해도 현실은 초라하고 무능력한 소인배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종가 내부의 사람들을 그려냄으로써 그 바깥에 자리 잡은 돌담은 권위보다는 폐쇄성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뒤바뀐다. 튼튼하게 가려놓은 돌담은 봉건질서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게 가려놓은 장막과 같다. 


 랑시에르는 문학의 정치란 새로운 대상들과 주체들을 공동의 무대 위로 오르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문학의 정치행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와 관련하여 정치는 자기일 외에 다른 것을 살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분노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공동체에 참여시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할 때 시작된다고 말한다. Politics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나왔다. 즉 폴리스에서 말하고 논의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인간일 수 있으며,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의 한계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시대에 폴리스에서 말하며 정치를 논할 수 있었던 이들은 귀족, 성인, 남성의 조건에 부합되는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오장환의 시 속에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살아있으나 말할 수 없고, 그들의 목소리는 공동체 주변에 떠돌며 부유하나 형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벽이라는 상징적 이미지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을 다시 꺼내고 그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한다. 문학의 정치 즉 문학의 역할은 곧 벽 너머에 가려진 것을 보게 만들고 잊혀 가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것임을 오장환은 자신의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이 지점이 바로 그가 기존의 생명파들과는 다르게 차별화되는 지점일 것이다. 


<참고문헌>
1. 한국 현대문학관, 「현대문학의 재발견 X [비디오 녹화자료] : 시인 이용악, 오장환, 백석편」
2. 도종환, 「오장환 시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88면
3. 도종환, 「도종환의 오장환 시 깊이 읽기」, 실천문학사, 2012, 85면
4.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11,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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