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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Sep 13. 2019

영화 <소수의견>

언론의 역할에 대해

 

 얼마 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지난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사유화했는가에 대해 고발했다. 언론은 제4의 권력으로 독립된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현대의 언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법과 정의뿐 아니라 언론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영화 <소수의견>에서 언론의 장, 단점과 그 역할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1097회] 몸통은 응답하라 - 방송 장악과 언론인 사찰의 실체


 소수의견에 나타난 언론의 장점으로는 첫째, 묻힐 사건을 주목받도록 하는 점이다. 박지호(이경영)의 국선변호를 맡은 윤진원(윤계상)은 경찰(김희택)이 자신의 아들(박신우)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박지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문사 기자인 수경(김옥빈)을 통해 사건에 의구심을 갖게 되고 이 사건이 거대 이권들이 개입된 사건임을 알게 된다. 여론의 주목으로 그는 단번에 국가배상 소송까지 나아갈 힘을 얻는다. 언론은 이처럼 사건에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켜 사건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현장 상황에 대한 증언을 거부했던 경찰도 사건이 여론의 주목을 받자 증언을 하기로 결심하며 그밖에 조력자들이 나타날 수 있게 만든다. 언론은 거대한 음모가 얽힌 사건의 진실을 폭로할 수 있도록 만드는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소수의견> 스틸컷

 둘째, 담론을 형성한다. 이 영화에서 뉴스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탁구장에서 대석(유해진)과 진원이 짜장면을 먹으며 보는 ‘서북부 연쇄살인’에 대한 보도이다. 이 뉴스를 보며 인물들은 범죄자의 신상공개와 인권에 대해 흘러가듯 한 마디씩 보탠다. 영화 전체로 봤을 때 크게 중요한 장면은 아니지만 이는 언론이 어떻게 담론을 형성하는 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며 뉴스를 통해 사건을 인식하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건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덧붙이며 토론의 장이 형성된다. 결과적으로 언론을 통해 시민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하게 된다.


 반대로 언론의 단점으로는 우선, 프레이밍(framing) 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검사장은 수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론도 프레임이 나쁘지 않고, 큰 줄기로 보면 저희도 무리할 일 없습니다.’ 프레임은 창문이라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 대상을 바라보는 틀, 관점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프레임을 통해 현상을 인식한다. 미디어 분야에서 적용된 프레이밍 이론은 뉴스가 사회적 이슈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프레임을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의미한다. 뉴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그 일부를 선택하고 강조해서 보여준다. 뉴스는 자신의 성향에 맞게 기사를 각색하는데, 이처럼 언론이 특정한 프레임을 통해 보도를 하면 사건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형성되는 등 여론에 영향을 왜곡, 조작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프레임을 어떻게 짜는가에 따라 여론이 달라지고 그것이 곧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리는 검사의 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언론이 거대세력의 산하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다. 박지호 사건에 대한 기사를 내지 못하는 수정을 보고 대석은 ‘신문사 조직이 어디 기자 하나로 돌아가냐.’라고 말한다. 언론도 이익을 위해 구성된 하나의 조직이자 집단이다. 그 속에서 한 명의 기자가 진실을 파헤치려고 한들 이는 쉽게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는 바를 암시한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서북부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보도 확대의 배후에는 청와대가 있었다는 것을 인물들은 알게 된다. 세간의 관심을 다른 사건에 집중시키고 자신들이 감추고자 했던 사건을 조용히 묻히도록 언론을 조작했던 정부의 모습은 현재의 언론과 겹쳐진다. 과거 이명박 정권에서 한국형 워터게이트라 불렸던 원충연 수첩 보도는 그날 점심 연평도 포격으로 오후가 되자 순식간에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자행했던 민간인 사찰의 의혹은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졌다.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언론은 정부뿐 아니라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릴 위험이 크다.


 언론은 watchdog 즉 감시견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정부나 기업과 같은 거대세력의 문제를 감시하고 비판할 때 그 존립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리고 실제 우리가 보낸 지난 10년의 시간 동안 언론은 감시의 대상을 되려 지키는 충견의 역할을 수행했다.

 

 사건을 조작하려 했던 비리검사 홍재 덕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라는 건 말이다.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누군가는 봉사를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유지되는 거야. 말하자면 박지호는 희생을 하고 나는 봉사를 한 거지. 근데 넌, 결국 넌 뭘 한 거냐?”

국민의 입이 되어야 하는 언론이 정권의 입이 되는 순간 국민은 봉사하고 희생되어야 하는 부속품이 되어버린다.  


 감시견이 짖지 않는 국가에서는 더 이상 토론과 올바른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한 국가의 민주주의는 당연히 후퇴할 수밖에 없다. 내부적 비판이 사라지고 조용해진 언론사에서는 일방적 지시와 수행만이 존재했다고 보도국 직원들은 회고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은 철거마을을 보여준다. 첫 장면에 가득했던 기자들이 사라지자 마지막 장면에서 철거는 다시 시작되었고 더 이상 마을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언론이 사라진 마을과 국가는 안전하게 존재할 수 없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새빨간 글씨의 벽보는 김희택, 박신우의 죽음과 관련하여 관객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1% 자본가를 제외한 99% 온 국민 여러분이 우리 모두가 예비 철거민입니다.’ 


감시견이 충견으로 변모한 나라에서 촛불을 들지 않는 국민은 모두 김희택과 박신우가 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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