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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Sep 13. 2019

영화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사야카가 관계의 관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녀의 엄마, 츠보타 선생 그리고 친구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컷


 엄마는 사야카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학교를 찾아간다. 그녀와 학교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늘 등장하는 것은 해당 학교의 교육방침이다. ‘어릴 때는 왕따같이 이런저런 일을 겪어봐야 성장하니, 그냥 참고 넘어가시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에 딸을 전학을 시킨다. 고등학교에서 담배를 걸린 사야카의 문제로 학교에 찾아온 엄마는 ‘친구들을 고발하는 것이 이 학교의 교육 방침이고 진정 옳은 교육이라면 제 딸은 퇴학당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야카는 무기한 정학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던 엄마가 츠보타 선생님에게 사야카를 맡기는 것은 그의 교육방침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교육방침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성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면 학생들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츠보타 선생은 사아카가 사회에서 만난 또 다른 ‘엄마’이기도 하다.



 츠보타 선생이 엄마와 동일시되는 장면은 사야카의 노래방과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영화 앞부분에 엄마의 아르바이트 장면과 사야카가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노는 장면이 오버랩되어 나오고, 영화 후반부에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는 사야카와 그녀를 위해 편지를 쓰는 츠보타 선생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두 장면은 사야카를 위해 노력하는 엄마와 츠보타 선생의 사랑과 그리고 시험을 치기 전과 후에도 변함없이 사야카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꿈을 응원하는 친구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사야카가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사야카의 가족

 반면, 사야카와 대조되는 인물은 단연 그의 남동생인 류타일 것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사야카와 대조되는 인물이다. 이런 두 인물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은 슬럼프이다. 모의 고사장에서 주변 친구들의 샤프 소리에 예민해져 자신의 시험지에 집중하지 못하던 사야카는 결국 E등급을 받는다. 지나간 결과에 대해 미련을 두지 말라며 사야카의 작은 성장을 독려하는 츠보타 선생의 응원에도 사야카는 ‘다른 애들은 더 향상될 것이 아니냐.’ 라며 처음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공부의 의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 대사이기도 하다. 공부는 타인을 기준으로 삼게 되면, 자신의 것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곧이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류타의 슬럼프 장면이다. 그는 훈련을 빼먹고 아빠에게 뺨을 맞는다.


 사야카는 자신의 낮은 모의고사 성적과 어려운 게이오 대학교의 기출문제를 보고 슬럼프가 왔고, 류타는 진학한 야구 명문고에서 엄청난 실력을 지닌 친구들을 보며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사야카가 슬럼프에 와서 좌절하자 엄마는 ‘사야카가 학원을 다니며 즐거워했고,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기에 게이오 진학을 포기해도 상관없다.’ 고 말한다. 하지만 류타는 끊임없이 ‘넌 하기만 하면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재능에 대한 독려, 혹은 매질로 다시 돌아갈 힘을 잃게 된다.



출처 : EBS 교육대기획 '학교란 무엇인가 - 칭찬의 역효과'

 이와 유사한 스탠퍼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과의 실험을 예로 들 수 있다. 아이들에게 아주 쉬운 문제를 풀게 하고 나중에 나온 점수와 함께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한 마디씩을 해주었다. 절반의 아이들에게는 ‘너는 참 똑똑하다’라는 지능을 칭찬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너는 참 애썼구나.’라는 그들의 노력을 칭찬했다. 두 번째 시험은 쉬운 시험지와 어려운 시험지 중 아이들이 선택하도록 했다. 노력에 대한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90%가 어려운 시험지를, 지능에 대한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대부분 쉬운 시험지를 골랐다. 자신의 재능만을 칭찬받고 자라온 아이들은 어려움이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시험은 아주 어려운 시험이었다. 노력에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발전을 보였고, 지능/재능을 칭찬받은 아이들은 어려움과 난관 앞에서 낙담하고 실망했다. 마지막 네 번째 시험은 첫 번째 시험과 동일한 난이도의 쉬운 시험이었다. 노력에 대한 칭찬을 받은 집단은 처음 치른 성적에 비해 30%가 올랐고, 지능/재능에 대한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오히려 20% 성적이 하락했다. 이는 곧 지능과 재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달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노력이 아닌 지능에 대한 칭찬은 도리어 아이들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의지를 잃게 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공부가 과정이 아닌 결과가 중요시되고, 자신의 작은 성장이 아닌 타인과 비교한 점수로만 평가하기 시작하면 공부의 결과는 물론 개인의 동기부여 및 발달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영화와 심리학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다. 슬럼프가 왔을 때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라는 위로를 얻은 개인은 다시 돌아가 시작할 용기를 얻지만, 그만둘 수 없고 강제되는 개인은 결국 도전할 의욕마저 상실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한, 엄마는 과거 자신의 엄마 즉 사야카의 할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족력을 끊어내고 자신의 아이들은 달리 키워 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사야카의 아빠는 프로야구 선수라는 자신의 지난 꿈을 아들을 도구삼아 이루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지난 과거를 벗어나 성장한다는 공부의 의의와 이어진다. 즉 엄마는 올바른 공부의 태도, 과거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이지만, 아빠는 그 반대의 모습인 것이다. 이는 사야카가 츠보타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의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전 늘 항상 어른들이 싫었어요. 겉모습만 보고 절대 안 된다는 어른들. 너무 어처구니없었어요.’ 그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한 어른들은 실은 과거를 끊어내고 성장을 스스로 멈춰버린 못난 개인인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어색한 이유는 끊임없이 진정한 공부의 의의를 말함과 동시에 모순되는 대사들이 계속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야카가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어주며 ‘세상은 단 하룻밤에 변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또 ‘메이란 중학교를 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곳에 가면, 사야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돼.’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딸과 게이오 대학 식당에 가서 ‘이런 대학에서 공부한다면, 좀 다른 인생이겠지.’라고 말한다. 엄마가 사야카에게 공부와 연관 지어 계속 시사하는 바는 ‘새로운 세상’이다. 어떤 집단에 속하며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으며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룻밤만에 먹은 마음으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절대 한 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물론 하룻밤만에 마음을 달리 먹으면 세상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긍정적 의도를 강조한 대사이겠지만, 이는 계단식 노력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 사야카의 성적 또한 계단식으로 올랐음에도 이런 대사를 병치시키는 것은 다소 어색하다. 또한, 특출 난 집단에 소속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것 또한 경솔한 이야기다. 이 영화가 심오한 의미를 관객에게 던져주지 못하고 단순 청춘 성장영화에 그치는 것은 그저 일류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무책임한 낙관적 태도 때문이다.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10대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시사할 수 있겠지만, 대학을 진학한 이후의 청춘들에게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설득을 이런 대사들이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의하면, 오늘날의 사회는 성과사회다. 성과사회의 주체들은 자유롭게 느끼지만, 사실은 자유롭지 않다. 중,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공부하라고 해서 했겠지만, 대학교 졸업하고 나면 아무도 청춘들에게 공부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회사 가기 위해서, 좋은 토익 점수를 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한다. 내 꿈은 삼성에 취직하는 것 혹은 내 꿈은 7급 공무원이라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 한다고 착각하지만, 안 하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유로운 동시에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대학 졸업생들도 우울하고, 취업 준비생도 우울하고, 회사원도 우울하다. 그 속에서 더 나아지기 위해 경쟁해야 하니 무한 긍정을 하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모두 우울하다.


 츠보타 선생 역시 끊임없이 사야카에게 막연한 긍정과 환상을 심어준다. ‘게이오 대학에 가면 세상은 더 넓어 보일 거다. 인생도 더 풍족해지고.’ 사야카가 타고 다른 세상 즉 게이오 대학을 향하는 신칸센 저 너머에서 츠보타 선생은 기쁘며 응원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기뻐할 일일까? 신칸센은 사야카가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상징으로 계속해서 등장한다. 사야카는 어린 시절 단지 신칸센을 멀리 떨어져 바라보며 그저 동경할 뿐이었지만, 영화 마지막에 그녀는 그 신칸센을 타고 ‘다른 세상’으로 향한다. 이 영화는 과연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지점을 드러내는 지점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아들만을 위하고 폭력적이나 실은 알고 보면 속은 따뜻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고 묵묵히 희생하는 헌신적인 어머니. 가부장적 가족을 억지로 따뜻하게 만들고 있는 어색한 전개.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라는 80년대의 전형적인 성공신화. 무한 긍정의 사회에서 자기 자신과의 전쟁을 치르는 미화된 개인. 잘난 한 명의 자식이 온 가족의 희망이 되도록 강요하는 착한 딸 신드롬. 이 많은 불편한 지점들 속에서 우리가 얻어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고 했다. 일본 사회는 한국의 10년 후라고 할 정도로 두 나라는 가정, 교육, 경제 등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줄어가는 학령인구, 우울한 20대, 끝이 보이지 않은 어두운 경제 속에서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청춘영화는 이제 그만 나올 때도 됐다. 혁신적인 도전을 하지 않는 20대는 기본적인 생존의 안전망조차 갖추지 못한 나라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만해도 괜찮아. 내가 여기 있으니,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도 돼.’라고 말하는 엄마가 있었기에 사야카는 게이오 대학이라는 과감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한국의 20대들에게도 ‘그쯤 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아야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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